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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축의 거장 ‘기억의 회로’를 건설하다

입력 : 2014-05-08 22:08:00 수정 : 2014-05-08 22: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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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93〉기억과 시간
# 기억의 불완전성과 기억의 왜곡

모든 사람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수학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노래, 어떤 사람은 달리기, 심지어 말을 꾸며내기를 잘하는 사람도 있다. 말을 꾸며내는 재능이 잘 쓰이면 소설가가 되거나 대단한 이야기꾼이 되지만, 잘못 쓰일 경우 거짓말쟁이, 심할 경우 사기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간혹 다방면에 걸쳐 대단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 혹은 많아야 둘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 재능을 적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좀 뛰어나게 잘하는 경우, 천재적인 재능이라고 따로 불러주기도 한다. 

이탈리아 건축가 알도 로시가 1979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해 설계한 물 위의 극장.
내 경우를 돌이켜 보자면 공부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숫자를 기억하고 계산하는 데 아주 서툴렀고, 운동이나 음악에도 평균 이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덩달아 기억력이 잘 쓰이는 과목인 역사, 지리 등을 무척 좋아했고 잘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이나 공간에 대해 기억해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령 어린 시절 있었던 사소한 일들이나 살았던 동네의 모습, 골목, 이웃과 있었던 일 등을 멀게는 네 살 무렵까지도 기억해 내곤 한다.

그럴 때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 첫 번째는 굉장히 놀라는 부류, 두 번째는 그 기억을 믿을 수 없어하는 부류가 있다. 하긴 이미 50여 년 전의 기억이다 보니 증명하기가 쉽지는 않다. 나도 간혹 그 기억들이라는 것이 정말 정확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헛갈린다. 그 기억들은 하나의 완성된 모습이거나 연속성이 있는 모습이 아니라 마치 깨진 병 조각처럼 바닥에 흩어진 채 각자 따로 반짝거린다. 다시 말해 ‘기억의 파편들’은 특별한 어떤 순간만 산발적으로 생생하게 기억될 뿐이다. 더군다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 네 살 무렵의 일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엊그제 일어났던 일은 까마득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우리의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이란 참 묘한 작동원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장치다.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대부분 자신은 바르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왜곡된 채 꺼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인 대니얼 섁터는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을 통해서 기억이 어떻게 왜곡되어지는지를 7가지의 범주로 분류해서 설명한다. 그가 예시한 기억의 7가지 인자는 소멸, 정신없음, 막힘, 오귀인(誤歸因),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이다. 그는 기억이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소멸’, 어떤 정보나 기억이 입에서 뱅뱅 돌기만 하면서 나오지 않는 ‘막힘’, 유도질문이나 암시 등 누군가의 던져주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기존의 기억이 흐트러지는 ‘피암시성’, 기억의 출처를 혼동하여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나 이야기를 자신의 창작으로 오해하여 본의 아닌 표절을 하게 되는 오귀인 등 다양한 범주를 예시한다. 특히 사람들이 끔찍한 경험을 한 후 그 기억에 갇혀 오래도록 고통을 당하는 경우(말하자면 ‘트라우마’ 같은)을 뜻하는 ‘지속성’의 죄악은 “기억이라는 감옥에 갇힌 비극적 죄수”로 비유했다. 그리고 말미에 그런 현상은 인간진화의 부산물이며 우리의 뇌 기능이 제대로 실현되고 처리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기억의 불완전성과 기억의 왜곡은 자연스러운 진화의 부산물이라는 이야기인가.

# 기억과 시간 속에서 길을 잃다

올해의 봄이 시작되는 3월 첫날 프랑스의 영화감독 알랭 레네가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예전에 어떤 잡지에서 유명한 현대 무용가 머스 커닝햄이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를 주제로 만든 안무를 소개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머스 커닝햄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이스의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의 열렬한 팬”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나 역시 알랭 레네의 영화를 몇 편 보지 않았고 그나마 본 영화도 무척 괴로워하면서 보았지만, 알랭 레네의 열렬한 팬이다. 그건 아마 그가 평생 영화를 통해 보여주었던 시간, 기억 등의 주제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과 영화적 해석에 보내는 존경이었을 것이다.

시간 감각을 빼앗아가는 장면의 불연속적인 전환 그리고 이차원의 그림처럼 평평하고 도식적인 건축, 조경 등이 어우러진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의 한 장면.
알랭 레네에 대해 알기 시작했던 1970년대에는 열악한 문화적인 상황으로 인해 그의 영화를 쉽게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의 영화를 보게 된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어떤 대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감동할 준비가 된 상태라면 대부분 대단한 감동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의 영화는 무척 지루했다. 더구나 제일 먼저 본 영화는 그중에서도 난해한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L’Annee Derniere A Marienbad)’였다.

알랭 레네는 1922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8㎜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수한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거쳐, 30대 후반인 1959년 ‘히로시마 내사랑’으로 극영화에 데뷔하게 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작가가 직접 각본 작업을 해서 일본과 합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각자 슬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두 남녀(프랑스인 여배우와 일본인 건축가)가 만나, 서로를 보며 각자의 슬픈 기억을 떠올린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무척 심각한 영화였다. 이 영화를 통해서 알랭 레네는 기억과 시간에 대한 그의 앞으로의 작업 방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를 통해 더욱 심각하고 더욱 난해한 방식으로 기억에 대한 영화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이 영화에서는 반복적으로 들리는 단조로운 배경음악, 정지한 것인지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물들, 시간 감각을 빼앗아가는 장면의 불연속적인 전환 그리고 이차원의 그림처럼 평평하고 도식적인 건축, 조경 등이 어우러진다. 게다가 도대체 알아챌 수 없는 주인공들의 대사는 감독이 관객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계속 쫓아다니며 발을 걸어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발에 걸려 비틀거리고 넘어지기도 한다.

줄거리는 마리앙바드라는 곳에 있는 아주 고전적인 건물에서, 작년에 우리가 만났다고 주장하는 남자와 그 사실을 기억을 할 수 없다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남자는 지속적으로 그 여자를 쫓아다니며 작년의 일을 상기시키고, 여자는 번번이 기억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다지 길지 않은 한 시간 반 정도의 영화이지만, 시간을 두들겨서 길게 펴놓은 듯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의 시간을 느끼게 해준다. 별다른 사건도 없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두 사람 외에는 마치 벽에 그려놓은 그림처럼 평평하다. 그 상태로 영화가 지속된다. 작년의 기억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기억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조차 귀찮아질 때쯤 영화는 끝이 난다.

시작할 때 아무런 감정이 섞여 들어가지 않은 마르고 건조한 내레이션으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대한 설명이 펼쳐지는데, 끝날 때도 그 장소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마치 그 장소가 커다란 의미라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감독의 의도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그 지루한 설명의 제일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곳에서 당신은 이제 길을 잃어버렸다. 영원히…. 깊은 밤에 나와 함께.”

영화 또한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끝난다.

영화에서 나오는 기억들은 순서가 어긋나고 이야기와 상황도 맞지 않는다. 다만 보는 사람이 감독이 제시하는 상황과 이야기를 재료로 해서 각자 재구성하며 추측할 뿐이다. 감독은 결국 우리를 미로로 안내하고 각자 알아서 빠져나오던가 아니면 한없이 미로에서 소요하게 하는 것이다. 

1971년 알도 로시가 디자인한 ‘산 카탈도 공동묘지’.
#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기억을 재구성하다

‘지난해 마리앙바드’를 통해 알랭 레네는 인간의 기억에 대한, 인간이 느끼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기억이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쪽으로 만들어지는 ‘현재’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된 과거일 뿐이다”라고.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그는 ‘공간화 된 시간개념’ 즉,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개념을 거부한다.

“나는 놀랍게도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은 ‘지속하지’ 않고 실증과학은 본질적으로 지속을 제거함으로써 성립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사색의 출발점으로 삼아 나는 점차 그때까지 받아들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내 관점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습니다.”

시간이란 지속되는 것이고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수축되거나 확장되고 그에 따라 스스로 갱신하는 과거를 이야기한다. 과거는 늘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다는 이야기이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 지어진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물을 연상케 하는 예술박물관.
건축 또한 시간과 기억의 토대 위에서 성립한다. 대부분의 건축가가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그것을 자신의 건축에 직접적으로 표현한 건축가를 꼽으라고 하면, 알도 로시(1931∼1997)라는 이탈리아 건축가가 떠오른다. 공간의 기억이 축적된, 즉 역사와 전통을 지닌 도시나 국가를 기반으로 현대건축을 하는 건축가들은 늘 과거의 시간과 그에 대한 기억이 담긴 환경을 어디까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혹은 부정할 것인가 하는 숙제를 짊어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건축 활동을 하던 로시 또한 과거와의 연결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기억의 회로를 거친 건축’을 하는 건축가로 알려졌지만 결코 과거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다. 로시의 모든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사용된 건축적 어휘들이 있는데, 유럽의 전통 도시에 대한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낸 단순화 시킨 건축적 유형(type)들이다.

그것은 기억 속에 잠재하는 이미지를 기하학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반복되는 사각형의 창, 규칙적으로 늘어선 기둥은 거리의 모습을 상징하고 ㄷ자나 ㅁ자형의 배치는 전통적인 유럽의 광장을 반영한다. 그래서 그의 건축을 보면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로 아주 추상적으로 보이면서도 어디에선가 본 듯하고 그래서 아주 익숙한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해 그의 건축은 기억과 시간을 시적으로 함축하고 단순화시켜 우리에게 제시한다. 로시는 유행을 피하고 이론의 탄탄한 토대에서 주관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으로 디자인을 전개한 능력을 인정받아 1990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세상에 알린 작품은 모데나에 있는 ‘산 카탈도 공동묘지’이다. 자신의 저서인 ‘과학적 자서전’에서 로시는 1971년 일어났던 자동차 사고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음을 묘사하면서, 당시 자신의 젊음의 종말과 모데나의 묘지 프로젝트에 대한 영감을 얻었음을 설명한다. 병원에서 회복되는 동안 그는 삶의 거대한 야영지로서의 도시에 대해, 그리고 사자의 도시로서의 묘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기존의 전형적인 고전적 묘지를 하나의 작은 도시로 이해하고 확장한 디자인은 1971년 당선되었고 단계적으로 건설되었다.

역사적 도시에 흐르는 일상적 기억을 기하학적 언어로 번역한 로시의 건축에서,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시간을 만나고, 산 자가 죽은 이들을 위한 도시를 거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에 저장되어 있던 과거라는 기억과 시간의 단편들은 건축이라는 몸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집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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