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신씨의 시조는 신라 공족(公族·귀족) 출신으로 고려 때 검교군기감을 역임한 신성용(申成用)이다. 그의 집안은 신라시대 이후 대대로 고령에 살면서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고령지방에 근거지를 둔 대가야의 왕족출신일 것이라고 고령신씨 대종회 측에선 추측하고 있다. 즉 김해김씨가 김해지방에 근거지를 둔 금관가야 수로왕의 후손들이라면, 고령신씨는 고령지방에 근거지를 둔 대가야의 이진아시왕(伊珍阿?王, 뇌질주일)의 후예라는 것이다.
원래 가야국 건립신화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삼국유사에 실린 것으로 구지봉 거북이 알에서 태어난 여섯 명이 각각 6가야를 다스렸다는 수로왕 신화이다. 다른 하나는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린 정견모주설화(正見母主說話)이다. 그중 정견모주설화를 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가야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성용의 묘 고령신씨 시조인 신성용의 묘는 경북 고령군 쌍림면 만대산에 있다. |
고령신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357명의 과거 급제자(문과·무과·잡과 포함)를 배출했으며, 그중 상신 3명, 대제학 3명 등을 배출한 명문가 중의 하나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총 3만6250가구에 11만696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령신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 이야기했듯이 고령신씨의 시조는 고령지역에서 호장을 지낸 신성용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검교군기감에 올랐는데, 그의 후손들이 그가 누대로 세거한 고령지역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신성용의 현손인 신덕린(申德隣)이 고려말에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친교했다. 하지만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공조참의를 역임한 아들 신포시(申包翅)와 함께 개성 두류산에 은거하다, 다시 전라도 광주의 서석산으로 옮겨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이로 인해 신덕린은 두문 72현에 배향되었다. 특히 그의 뛰어난 필체는 ‘덕린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포시는 신장(申檣), 신평(申枰), 신제(申梯) 등 3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하여 고령신씨의 3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맏아들 신장은 직제학과 부제학을 거쳐 오랫동안 대제학에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둘째 신평은 사간원 정언을 역임했고, 셋째 신제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특히 첫째 신장의 5형제 아들 대에서 크게 번창했다.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숙주(申叔舟), 신말주(申末舟)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는데, 그들의 후손 중에서 3정승, 3문형을 비롯해 91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왔다. 그중 특히 신숙주(申叔舟)가 뛰어났는데, 그는 성삼문, 박팽년과 함께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다. 세종 2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을 시작으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6대 임금을 섬겼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것을 의논했으며, 경국대전,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는 특히 언어학에 뛰어났다.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골어, 여진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고 심지어 인도어, 아라비아어까지 터득했다고 한다. 그의 언어적 재능이 세종의 한글창제에 크게 도움을 준 것 같다. 그가 세조인 수양대군과 친하게 된 것은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했던 것인 계기가 된 듯하다. 그 후 그는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정난공신에 오르고, 세조 때 좌익공신, 예종 때 익대공신, 성종 때 좌리공신 등 잇달아 공신에 책록되었다. 또 벼슬로는 대제학, 병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대학자로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이름을 떨쳤고, 그 후손이 크게 번창했다. 신숙주의 아우인 신말주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순창에 은거했으나 후에 대사간을 거쳐 진주목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신숙주 영정 조선의 대표적인 명신으로 6임금을 섬겼으며, 고령신씨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보한재 신숙주이다. 세종을 도와 한글창제에 기여하였으며, 세조실록, 해동제국기 등 수많은 서적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
신종호의 아들 신항(申沆)은 성종의 딸인 혜숙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고원위)가 되고 연산군 때 부종관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신잠(申潛)은 시·서·화에 뛰어나 3절(絶)이라 불렸다. 특히 조광조가 개혁정치를 하며 발탁한 문인현량과 출신으로 덕망이 두터웠다. 신항의 손자 신의(申儀)는 중종의 부마가 되었으며, 종증손인 신경식(申景植)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신숙주의 둘째인 신면의 아들 신용개(申用漑)는 연산군 폐비윤씨와 연루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입어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어 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신응구(申應?)는 인조반정 후 춘천부사를 지냈고, 신응구의 손자 신익상(申翼相)은 갑술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뒤 공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신숙주의 일곱째 신형의 아들 신광한(申光漢)은 을사사화 때 소윤(少尹)에 속하여 대윤(大尹) 일파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양관대제학에 좌찬성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신광한의 종증손인 신용(申涌)은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신식(申湜) 형제는 대사헌을 역임하고, 문한으로 유명하다.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申末舟)의 손자 신공제(申公濟)는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신공제의 4대손인 신경준(申景濬)은 지리학을 개척한 실학자이며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저술하여 한글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영조 때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거쳐 서산군수를 지냈다.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與地考)’를 담당하여 그 공으로 동부승지에 올랐다. 이 밖에 신숙주의 10대손으로 신호(申澔)의 아들인 신광수(申光洙)는 의금부도사와 승지를 지냈으며 시·서·화에 뛰어나 3절로 불렸다.
고령신씨 중에서 근세인물로 뛰어난 사람 중에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신윤복(申潤福)이 있다. 그는 고령신씨의 서얼출신으로 화원에 들어가 첨정에 올랐다. 그의 그림 중에는 기녀, 무속, 주점 등 당시로서는 금기시되는 현실묘사와 인간주의적 욕망을 표현하였다.
◆고령신씨 근현대 인물
고령신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있으며, 3·1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신홍식(申洪植),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주춧돌 역할을 한 신규식(申圭植), 일제 치하 만주로 망명하여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했던 신백우(申伯雨), 이동녕 등과 함께 이완용 집을 습격했던 신황(申滉) 등도 고령신씨 가문을 빛낸 독립투사들이다.
단재 신채호 민족주체사관의 대표적 인사인 단재 신채호의 영정. |
신채호 사당 충북 청원에 있는 단재 신채호의 사당과 기념관 |
상해로 망명한 뒤 손문을 만난 후 교유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하는 데 주춧돌 역할을 하였다. 또한 손문의 중국정부로부터 상해임시정부가 국가승인을 얻는 데도 기여하였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 고질적인 파벌싸움에 25일 동안 불식(不食), 부언(不言), 불약(不藥)을 고집하다 호흡단절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남대문 편액 남대문 편액은 명필로 이름이 높은 고령신씨 암헌공파 파조인 신장이 쓴 글씨이다. |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