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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에 한양금산(禁山) 제도라는 게 있었다. 도성 안팎 일정한 구역 안에서는 농사짓기, 집짓기, 나무하기 등 경제 활동이 금지됐다. 성 북쪽으로 북한산·도봉산 일대, 서쪽으로는 무악재 일대, 동으로는 안암로터리 부근, 남으로는 이태원∼청파동 일원을 잇는 환형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성저십리라 해서 4대문을 기점으로 10리 밖까지 규제가 확대된다. 한양 인구가 늘어나고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많이 느슨해졌지만 구한말까지 유지됐다. 도시의 팽창을 막고 자연을 보전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그린벨트 제도라고 할 만하다. 이 제도는 도시계획적인 측면보다는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땅의 기운을 모아 국운을 일으키고 왕업을 번성케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 중반부터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구는 수도권으로 몰렸다. 도시 빈민이 집단 이주하고 소규모 공장이 난립하면서 서울 외곽의 녹지지구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수도권 대기오염 또한 심각했다. 1971년 7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급기야 서울에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을 지정하는 초법적인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방지하고 자연환경을 보전해 생활환경을 확보할 목적이었다. 해외 언론은 한국의 환경보전 사업이라고 극찬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듬해 전국 주요 도시권으로 확대된다.

그린벨트에선 가옥 등의 신증축이 통제되고, 개축하는 일도 쉽지 않다. 땅 소유자들로부터 재산권 침해라는 민원이 끊이질 않았으나 당시 군부독재에 소송으로 맞선 경우는 없었다. 국가적 통치수단의 일부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영삼정부 때부터 그린벨트 해제 범위를 조금씩 넓히다가 김대중정부 들어서 서울지역의 상당 부분이 풀렸다.

정부가 분당 신도시 면적의 16배 크기인 그린벨트 308㎢를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해제한다. 개발논리에 밀린 것이다. 환경단체의 반발 또한 거세다. 개발과 보존의 가치 문제는 늘 상충하기 마련이다. 큰 변화 없이 이어진 그린벨트는 보기 드문 성공사례다. 하지만 국토가 비좁은 우리로서는 개발을 마냥 포기할 수도 없는 문제다. 다만 한번 풀린 그린벨트는 복원이 불가능하다. 난개발과 녹지 보존 대책을 사전에 마련해야 함은 너무 당연하다.

박병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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