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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현모양처''를 읽는 여러가지 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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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11-10 14:56:00 수정 : 2007-11-10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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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란 이프 출판부장
전혀 우아하지 않은, 냉혈적이고 폭력적이고 서글픈 세계를 반어적으로 표현한 영화 ‘우아한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 전 아주 희한한 독법으로 이 영화를 읽은 글을 봤다. 폭력조직 들개파의 중간 보스 강인구(송강호 분)가 넓디넓은 새 집에 혼자 남아 라면을 끓여먹으며 캐나다에 가 있는 아내와 자녀의 행복한 한때를 담은 비디오를 보며 흐느껴 우는 엔딩 장면을 언급한 글은 이랬다. “어질고 착한 아내라면 남편이 그렇게 힘들고 외로울 때 위로를 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남편과 아버지를 돈 버는 기계로만 생각하니 그가 그렇게 고독한 거 아니냐.” 

그러나 영화에서 아내이자 어머니인 미령(박지영 분)은 기실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을 해치고 싸우고 때리고 맞고 사는 남편을 충분히 위로했고 충고도 했었다. 아무리 말려도 손을 씻지 않는 남편의 생활태도를 견디지 못해 마침내 아내가 ‘이혼하자’고 할 때 그는 말한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 아내는 말한다. “내가 일한다고 했을 때 못하게 했잖아. 애들 교육이나 잘 시키라고.” 그녀는 남편에게 조폭 일보다는 가게 하나 얻어서 함께 일하자고 계속해서 권유했었다. 남편의 외면에도 그녀는 집에서 아이교육을 시켰고, 피 흘리는 남편을 치료했고, 교도소 면회도 갔으며 아이에게 무조건 아버지를 욕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내가 떠나자 아이처럼 아내와 자식을 그리워하며 운다. 

며칠 전 ‘남편을 존중했더니 아이가 변했다’는 문구를 크게 뽑은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위대한 엄마의 조건’이라는 실로 엄청난 제목의 책을 낸 여성의 인터뷰였다. 2003년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다소 선언적이고 위협적인 제목의 책을 펴낸 장병혜씨는 또다시 ‘좋은 엄마’에서 ‘위대한 엄마’가 되려면 ‘아내가 CEO 역할하면서 남편을 명예회장이자 큰아들로 대하는 조직개편을 해보라’고,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아이들이 불안해합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를 위해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찾아주세요. 그게 엄마의 책임이에요”라는 그녀의 말이 그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 희생적인 여성의 삶에 억울해하지 말고 남편을 존중하고 아이를 잘 키워야 위대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그 말, 남편을 ‘큰아들’로 여기라는 그 말, 드라마나 연예뉴스나 보지 말고 남편의 관심사인 경제와 사회 기사를 읽어 말문을 트라는 그 말들이야말로, 위대하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힘겹게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수많은 평범한 어머니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 있다. 

텔레비전 광고 문구대로 여자는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으며 환희에 차 어머니가 된다. 이후 수많은 눈물과 땀, 책임을 맞이한다. 여성들은 각각 다른 삶의 다양한 기반 아래서 엄마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이는 힘겹게 돈을 벌어다 주는 남편을 내조하고 위로하는 ‘양처’로, 영재교육에 일로매진하여 일류대학에 아이를 보내는 ‘현모’로, 먹고 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아이를 전적으로 책임지지 못하는 세칭 ‘나쁜 엄마’로 살아가기도 한다. 어머니의 자리는 그토록 다양하다. 누구나 사랑과 행복이 가득 찬 가정을 꿈꾸지만 그게 어디 어머니 혼자만으론 이뤄질 일인가.

인고와 희생과 위로의 이름으로 ‘그리운 어머니’를 그리며 눈물짓고, 일등 아내감으로는 전문직 여성을 선호하면서, 전업주부는 ‘집에 가서 애나 보고 밥이나 지으라’고 비웃는 남성들. 취업주부에게는 ‘몇 푼 번다고 잘난 척이냐’고 종주먹을 들이대면서 끊임없이 만들어진 이미지의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만을 호명하는 이 사회의 여성관 아니 어머니관이 변화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위치한 자리에서 각자 나름의 ‘위대한’ 삶을 사는 이 시대 어머니들의 숨통이 트일 수 있을 것이다. 

권혁란 이프 출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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