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위패봉안관 검은색 대리석 현판에 또렷이 새겨져 있는 6·25전쟁 전사자의 이름이다.
‘육군 11야포단 72대대 소속 군번 123990’
죽었던 그가 살아서 돌아왔다.
1953년 7월 강원도 김화지구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아오지탄광등을 전전하며 평생을 보낸 20대의 젊은 육군중위가 부상과 강제노동으로 만신창이가 된 노구를 이끌고 사선을 넘어 52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첫번째 탈북은 실패=장씨가 죽어도 고향에서 눈을 감겠다는 일념으로 첫 번째 탈북을 시도한 것은 2년 전인 2003년 5월. 6·25전쟁 중 입은 오른쪽 정강이 부상이 악화돼 제대로 걸음도 떼지 못하는 그였지만 “남한에 사는 가족을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의 말만 믿고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허룽에 도착한 장씨는 서울에 살고 있는 동생 선광씨와 ‘전화 상봉’에 성공했다. 그러나 장씨가 귀가 어두워 동생과 제대로 통화할 수 없었다. 게다가 브로커가 수천만원의 탈북비용을 요구하자 선광씨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1차 탈북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북한으로 돌아온 장씨는 그러나 귀향의 꿈을 버지리 못했다. 장씨는 지난해 3월 인편을 통해 다시 아오지탄광에서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과 부모 형제 이름이 깨알같이 적힌 편지를 동생에게 보냈다.
형님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한 선광씨는 곧바로 국방부 등에 “(형님이) 조국과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사전 만반의 조치를 강구해 달라”고 진정서를 내는 등 형의 귀환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생활이 궁핍한 그로서는 믿을 곳은 정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국군포로 탈북 경비를 지원할 근거가 없으니 가족이 알아서 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정부 무관심으로 한때 북송 위기=실의에 잠겨 있던 장중위에게 브로커가 다시 찾아온 것은 지난 6월 초. “중국 옌지까지만 오면 뒤를 봐줄 테니 국경을 넘으라”는 브로커의 말에 지난 6월 14일 새벽 아들 등에 업혀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북한 탈출에 성공한 장씨는 브로커들이 마련한 옌지 시내의 한 아파트에 숨어 있었다.그러나 남쪽 가족들이 브로커가 요구하는 수천만원에 이르는 수고비 명목의 ‘몸값’을 마련치 못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20여일간 불안한 인질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정부는 탈북 직후 이 사실을 알았으나 장씨의 신변 안전 확보와 송환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장씨는 한때 중국 공안당국에 발각될 것을 우려한 브로커들에 의해 강제 북송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장씨 귀환을 추진했던 민간단체 관계자는 “장씨가 탈북한 지난 6월14일부터 국방부를 여러 차례 찾아가 가족들이 형편상 몸값 마련이 어려우니 이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
며 “하지만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북한 브로커들이 몸값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장씨를 다시 북으로 데려가겠다고 협박했다”며 “안면이 있는 조선족 브로커에 사정사정해서 북한 브로커에게 몸값 일부를 대신 주도록 해 가까스로 강제 북송을 막았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보름 넘게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본지의 탐사기획 ‘잊혀진 국군포로’ 시리즈가 보도(6월 21∼27일)된 뒤인 6월 말쯤 장씨 동생 집을 방문, “몸값을 해결하라”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광씨는 “6월 말쯤 국방부 관계자가 집으로 찾아와 몸값을 마련하라고 요청했다”며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정부가 나서 달라고 요청했지만 규정상 어렵다는 대답만 들었다”고 밝혔다.
북송 위기에 처했던 장씨는 이번달 초 국내 한 인권단체가 2000만원의 몸값을 마련, 지불한 다음에야 천신만고 끝에 중국 내 한국영사관 측에 인계될 수 있었다.
◆포로에서 탈북까지 52년=장씨는 휴전을 앞둔 1953년 7월 강원 김화지구전투에 관측장교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장씨는 당시 오른쪽 정강이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큰 부상을 당해 평생을 절룩거리며 살고 있다.
포로로 잡힌 장씨가 끌려간 곳은 악명 높은 함북 아오지탄광. 장씨는 아오지탄광에서도 가장 힘든 굴진·채탄 작업을 하며 30도가 넘는 갱도에서 30여년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혹독한 노역으로 장씨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고, 청력도 거의 상실했다.
장씨는 61세에 ‘연로보장’을 받고 서야 악몽 같은 탄광 노동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씨는 이후 함북 청진으로 옮겨졌고, 국경지역을 넘나드는 보따리상 등을 통해 남한 소식을 들으며 귀환의 꿈을 키워왔다.
특별기획취재팀 홍성일·최현태·김형구·김종수·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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