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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토를 가다](하)中, 유네스코 지정 추진 유적

입력 : 2004-03-05 15:51:00 수정 : 2004-03-05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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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도읍 오녀산성 지금도 ''위용''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중 역사전쟁’의 와중에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확인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고구려 유적에 대해 중국이 유네스코에 세계유산 지정신청을 추진 중이어서 접근이 여의치 않은 탓이 컸다. 그래서 본지는 수차례 현지에서 유적답사를 했던 한민족통일교육연구소 김금중 소장의 자료와 해석에 기대 그 자취들을 되짚어 봤다.
고구려 기상의 백미(白眉)를 논할 때 도읍지였던 오녀산성과 국내성 주변에 산재한 유적을 빼놓는다면 가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고구려 첫 도읍지이기도 한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현의 오녀산성은 지금 봐도 위압적이다. 100여m 높이의 절벽 위에 성을 쌓았으며, 동서 길이는 200m, 남북 600m로 성터와 주거지 병영 초소터 등이 있다.
김 소장은 “지형적으로 압록강 중류인데다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많고 땅이 기름져 생활하기가 편리했기 때문에 고구려 시조 주몽이 이곳을 도읍지로 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두번째 수도였던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는 국내성과 함께 높이 6.39m에 너비 1.3m에 1775자의 글자가 담긴 광개토대왕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국내성의 경우 성의 전체적인 윤곽은 찾을 길이 없으나 성벽은 그 형체를 남겨 당시 고구려의 위세를 보여준다. 국내성의 성벽 축조양식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전해졌다고 하니 기술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는 모양이다.
잘 알려진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린 비석으로 지안시에서 동쪽으로 4, 광개토대왕릉 200m 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설화,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이 담겨 있다. 최근 정비작업이 이뤄지면서 외곽에 투명 아크릴판으로 4면을 막아 놓아 예전처럼 가까이서 관찰하기가 어려워졌다. 김 소장은 “요동벌판을 누비고 중국대륙을 장악했던 고구려인의 늠름한 발자취”라고 했다.
지안시에서 5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수왕릉의 적석묘인 장군총. 정사각형 모습을 하고 있으며 1100여개의 화강암으로 축조됐는데 밑면 길이 31.58m이고 높이 12.4m, 각 변의 길이 35.6m로 7개의 층계로 이뤄져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린다. 당시 동북아 최강국 고구려의 위상을 실감케 해준다는 설명이다.
중국은 바로 이런 유적들을 ‘고구려 수도, 왕족과 귀족무덤’이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에 세계유산 지정을 신청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사에 편입된다’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의 논리를 깔고 있다. 하지만 이번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답사과정에서 중국 논리의 허상이 드러났다.
이번 답사를 주관한 김금중 소장이 1997년 청석관 부근에서 최초로 발굴한 뒤, 최근 중국인에 의해 청석관 앞에 옮겨 세워진 ‘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는 비석이 단적인 예다. 1940년대 초반 이 지역 현장을 지낸 중국인 신광서가 제작했다고 명시된 비문에는 ‘고구려 장군 연개소정이 당군과 맞서 이 관을 지켰다’며 청석관의 유래와 관련, 자연스럽게 고구려를 중국과 독립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로 기술하고 있지 않은가.
선양·옌볜=이천종기자
/sky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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