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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미관 개선… 도시화에 지워진 사람들

입력 : 2022-10-29 01:00:00 수정 : 2022-10-28 20: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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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아파트·초고층 빌딩 일색인 서울
개발 과정 순탄치 않았던 철거민 조망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직접 나서 고발

1960년대 산업화 이후 급증한 판자촌
경제 성장에 터전서 쫓겨난 아픔 그려
김수현 前 靑 정책실장 소멸 과정 추적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김윤영/후마니타스/1만6000원

 

가난이 사는 집: 판자촌의 삶과 죽음/김수현/오월의봄/1만8500원

 

‘신계 강정희’. 철거민 사이에서 이렇게 불렸던 강정희씨는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앉아서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등 편히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한다. 오래전 용산구청 앞에서 벌인 노숙 투쟁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요즘도 잠을 편하게 누워서 못 자요. 깨서 보면 내가 앉아서 졸고 있는 거야. 노숙 투쟁을 했잖아요. 그때 용산구청에서도 늘 긴장 속에서 사니까 밤에는 잠다운 잠을 못 자잖아요. 그랬던 게 제 몸에 배서 지금도 깊은 잠을 못 자고 불면증에서 시달려요…. 내 가재도구가 다 털렸기 때문에 뭐든 잘 버리지 못하는 병도 생겼어.”

그러니까 2004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부터 마포구 연남동까지 6.3㎞에 이르는 경의선숲길의 시작 지점인 용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위치한 신계동과 인근 도원동을 오가며 살았던 강씨는 신계동 일대가 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고층 아파트와 초고층 빌딩으로 빼곡한 서울에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최근 가난한 이들이 사는 도시 속 주거 형태에 대한 책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사진은 가난한 이들이 살았던 대표적 주거 형태인 봉천동 달동네. 세계일보 자료사진

강씨는 부모와 함께 살던 전남 영암군의 고향 마을에 대불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쫓겨 신계동의 달동네에 자리 잡았다. 결혼해 잠깐 근처의 도원동으로 옮겨갔지만, 24세 이른 나이에 이혼하면서 3개월 된 딸을 안고 다시 신계동으로 돌아온 강씨였다.

당시 신계동은 판잣집이 즐비한 달동네였다고 한다. 해 질 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길목의 정자나무 아래에서 주민과 아이들이 재잘댔고, 밤중에는 이웃과 밥이나 커피를 함께 먹기도 했다. 인근 성당 수녀들은 딸을 키워주는 등 혼자 사는 강씨에겐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 사이 보험 영업부터 노점상, 마늘까기 부업까지 살기 위해 악착같이 일을 해나갔다.

하지만 2004년 신계동 일대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직후부터 재개발조합은 마구잡이로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고, 2006년 사업시행 인가가 나온 뒤부터는 세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용역 깡패와 철거반을 동원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멀쩡한 가로등이 깨졌고, 눈에 잘 띄는 벽에 붉은 래커로 험악한 말이 이어졌으며, 혹시 집이라도 비면 곧바로 부서졌다.

20년 넘게 신계동에 살아온 강씨는 떠날 수 없었다. 결혼하며 잠깐 신계동을 떠나서 인근 도원동에서 살다가 이혼한 뒤 다시 신계동으로 돌아왔지만, 이때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직후여서 이주비 등의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에겐 돈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책 없이 윽박질러 쫓아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퇴거 압박은 점점 심해지더니 어느 날 아랫집에 살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폭언 폭행은 비일비재하고, 그 공포…. 나도 솔직히 무서웠지. 여기저기 하나둘 빈집이 생겨나는데 갈 곳은 없고. 딸내미가 그때 중학교 3학년인가, 고등학생인가 그랬는데 용역 깡패가 뒤쫓아 오면서 그래, ‘니 딸 이쁘더라. 이사 안 가면 니 딸 콱 어떻게 해버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들었지. 고양이를 죽여서 대문 앞에 매달아 놓고, 쥐를 죽여서 바닥에 깔아놓고 그랬어. 우리 집 담벼락에다가 ‘왕그지네집’ 막 이렇게 써놓고.”

결국 신계동 주민 대부분이 떠났다. 한동네에 살던 부모조차 이사를 갔다. 관리처분 계획 인가가 나온 뒤인 2008년 8월1일, 버티고 버텼던 강씨의 집이 철거됐다. 외출한 사이, 철거반 등에 의해 집이 사라졌다.

강씨는 그제야 10년 전인 1998년 도원동에서 벌어졌던 철거민의 망루 투쟁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의 집에서 창문을 열면 도원동이 보였는데, 어느 날 망루가 들어선 것도 보였다. 하지만 관심이 없었기에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곳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자신이 신계동에서 쫓겨난 뒤에야 도원동에서 쫓겨난 철거민을 이해하게 됐다.

철거민이 된 강씨는 한동안 용산구청 앞에서 투쟁했고, 철거민 투쟁과 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2012년 전북 고창군으로 귀농했다. 강씨가 쫓겨난 뒤 지어진 아파트는 2021년 현재 14억원 안팎에 거래되고 있다.

김윤영/후마니타스/1만6000원

책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은 2010년부터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해온 김윤영씨가 대도시 서울이 고층 아파트와 초고층 빌딩으로 지워 버린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지금의 서울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달동네와 판자촌, 쪽방, 노점상 등 가난의 거처를 지우며 형성된 것인지 깨닫게 해준다. 그리하여 신계 강정희씨를 비롯해 홍대 두리반의 안종녀씨, 아현동 박준경씨, 서울역 홈리스, 돈의동 쪽방촌 동선 아저씨, 잠실 포장마차 김영진씨 등을 살려낸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수현 세종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가 쓴 신간 ‘가난이 사는 집: 판자촌의 삶과 죽음’은 도시의 빈민이 주로 살았던 판자촌의 생로병사를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한때 서울 인구의 약 40%가 살았던 판자촌의 형성과 밀집, 그리고 소멸 과정을 추적한다.

책에 따르면, 판자촌의 원형인 토막촌은 조선 후기 사대문 밖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뒤 일제 강점기에 확산했다. 1960년대부터 산업화와 더불어 도시 유입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판자촌이 급격히 확산했다. 붉은색 시멘트 기와, 블록 벽, 목재를 활용해 주로 산 밑에 자리 잡은 허름한 집의 군락, 이른바 판자촌이 탄생한 것이었다.

김수현/오월의봄/1만8500원

판잣집은 대개 8평(약 26.5㎡) 공간 안에 평균 두 가정이 살았다. 판자촌에 살면서 공장이나 가게의 임시고용직, 일용 건설 노동을 전전했던 주민들은 판자촌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갔다. 서로 함께 일하기도 했고, 생활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상부상조했다. 골목길은 어린이집이자 유치원이 됐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판자촌은 자리를 잃어갔다. 1980년대까지 서울시민 10% 이상이 거주하던 판자촌이 10년 만에 2~3%만 사는 곳으로 줄었다. 판자촌에서 쫓겨난 이들은 다시 영구임대주택,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쪽방 등으로 밀려났다.

저자는 판자촌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지만, 가난한 이들의 주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늘리는 한편, 민간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저소득층에게 임대료를 보조해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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