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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재심 끝에 독립유공자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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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8-14 09:50:44 수정 : 2022-08-14 09: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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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면서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린 김명시(1907~1949, 경남 마산 출생) 장군이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면서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린 김명시(1907~1949, 경남 마산 출생) 장군. 열린사회희망연대 제공

14일 국가보훈처 등에 따르면 광복 제77주년을 맞아 항일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국가 수립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나 국가 기초를 다치는데 뚜렷한 공적이 있는 자에게 수여한다.

 

김명시 장군은 1925년 모스크바 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중국 상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고, 1932년 귀국해 활동하다가 붙잡혀 7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2년 조선의용군 여성부대를 지휘하면서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다르크’로 불리기도 했다.

 

해방 후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 장군은 194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가 부평경찰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독립운동 공을 세웠음에도 사회주의 활동 이력과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김 장군의 독립유공자 인정 운동은 2018년 경남지역 시민단체인 ‘열린사회희망연대(희망연대)’의 움직임으로 본격 시작됐다.

 

희망연대는 2019년 김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지만 ‘사망 경위 등 해방 후 행적 불분명’의 이유로 김 장군은 심사에서 제외됐다.

 

이후 희망연대는 1년7개월 동안 사료 수집에 나섰고 이 결과 유의미한 역사적 자료를 찾게 됐다.

 

김 장군의 사회주의 활동 이력에 관한 것인데, 세간에 알려진 ‘북로당 정치위원’과 관련된 자료였다.

 

희망연대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북로당에는 중앙위원과 감찰위원이라는 직책은 있지만 ‘정치위원’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명단에 김명시라는 이름도 있지 않았다고 한다.

 

희망연대는 지난해 7월 이 자료 등을 첨부해 국가보훈처에 재심을 요청했고, 이번에 김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희망연대는 “이는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가슴 벅찬 반가움과 함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21년간 일제와 목숨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에 대해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예우”라면서 “그러나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김명시 장군의 친족이라는 말도 못하고 냉가슴을 앓고 살아온 친인척들께도 축하드린다”며 “폭넓은 심사기준과 열린 역사관으로 밀양의 김원봉 장군과 같은 분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덧붙였다.

 

김명시 선생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번 훈장은 그의 여동생의 양아들이 받게 된다.

 

국가보훈처는 경북도청을 통해 훈장을 전달한다.

 

올해 독립유공자 포상은 총 303명이며, 이 중 김 장군과 같은 건국훈장 애국장은 19명에게 추서된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유관기관과 독립운동 사료수집 협업 체계를 공고히 하고 국내외 수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보다 다양한 독립운동 사례를 발굴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창원=강승우 기자 ks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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