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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여진』 안보윤 “고통스럽더라도, 다음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삶과 진실 직시해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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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7-27 07:30:00 수정 : 2022-07-26 1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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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밤, 옆집 아이가 다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이가 이렇게 우는데, 부모는 뭐 하는 거야. 벽 하나를 맞대고 생활하던 옆집 아이는 밤에도 자주 울었다. 주로 밤에 작업을 하던 소설가 안보윤은 처음 얼마간은 그러려니 하며 참았다. 뭐, 아기란 어쩔 수 없이 우니까. 그런데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자 자신도 모르게 아이 울음에 예민해졌다. 그날 아이는 새벽까지 계속 울었고, 마치 댐이 터지듯 그의 온 신경은 아이 울음에 쏠렸다. 부모가 아이를 너무 안 돌보는 거 아냐. 아이를 왜 이렇게 울리는 거야.

 

그날 새벽, 2개월 넘게 참았던 그는 마침내 옆집에 따지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디건을 집어 들고 미세한 바람을 일으키며 어깨 위를 감싸던 찰라, 다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아이 엄마의 처절한 소리였다. 절규하는 듯한, 달래면서 울부짖는 듯한.

안보윤 작가

그는 다시 몸을 돌이켜 자신의 의자에 앉혔다. 복잡한 생각이 장대비처럼 몰려왔다. 저 사람이 하다하다 못해서 새어나오는 소음이라면, 이건 내가 참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필사적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저 사람도 애환이 있을 텐데.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저 사람에겐 아기뿐만 아니라 나도 가해자일 수도…

 

“소음을 막으려는 사람도, 소음을 듣고 싶지 않아 하는 저도 필사적이었는데, 그 순간이 너무 애틋한 거예요. 저 사람도 안 됐고, 저도 안 됐고. 견딜 수 없는 소음이라고 납작하게 들여다보고 분했다, 견딜 수 없었다, 복수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는 살아야 하고 살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소음일 수 있다면,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소음 같은 것이 있다면. 층간소음 이야기를 너무 단어로만 해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너무 단순하게 봤던 게 아닐까.”

 

2017년 여름, 안보윤은 우울증을 앓는 할머니 댁에서 생활하던 남매의 소음에 불만을 품은 아랫집 남자에 의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해되는 내용을 그린 단편소설 「여진」을 문예지에 발표했다. 그는 소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두루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다.

 

“소년은 이제 알 수 있었다. 소년과 소년의 누나 안에서 어떤 세계가 완전히 막을 내렸음을. 희망이나 기적이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던 세계가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음을. 소년은 도도의 발가락과 두두의 발뒤꿈치를 간신히 바닥에 붙이고 섰다. 서서히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106쪽)

 

빛나는 문장으로 끝맺은 단편 「여진」은 2018년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는 오랫동안 두 남매의 도도와 두두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음속에 웅덩이 같은 것이 생겨 소리 없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안에 고인 것들은 때때로 찰랑댔고 때때로 질척거렸다. 웅덩이 주위를 자주 서성이다 자주 발이 젖었다.”(「작가의 말」 중에서). 처음에는 못 다한 이야기가 남아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소년은 이전의 세계가 끝났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끝맺음을 했는데, 계속 의문이 드는 거예요. 진짜 끝났나? 소년은 이제 성인이 돼야 할 텐데. 소년은 훨씬 더 많은 감각과 생각을 가지고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할 텐데. 내가 마치 그의 삶이 여기에서 끝난 것처럼 그 세계가 종료되었다고 말해도 괜찮은 건가. 사람들의 한시적 순간만을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남매는 어쨌든 성장할 것이고, 가해자 가족의 삶 역시 이어질 텐데.”

 

이들의 세계는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훨씬 더 지난한 세계가 펼쳐지리라고 생각되자, 그 세계를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건 이후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고, 그 일을 어떻게 견뎌내고 직시하면서 살아갈까. 좀더 책임지고 싶었다. 이들의 진짜 삶을, 사건 이후 전개될 진짜 삶의 진동을.

 

하지만 쉽지 않았다. 어느 때에는 항변조의 목소리가 자꾸 흘러 나왔고, 어떤 때에는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거짓말 같았다. 썼다가 지우고. 이제 괜찮아졌어, 라고 말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게 보였다. 썼다가 또 지우고.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장마철 계곡의 불어난 물처럼 뭉텅이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삶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데까지만, 그러니까 첫발을 내딛는 데까지만 나아가기로 타협했다.

 

“이들이 행복해지면 좋겠지만, 그러면 또 무책임해지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들의 세계는 끝났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버리면, 제가 들여다보고 싶었던 이들의 진득한 삶은 다시 뒤로 물러나 버리니까요. 이들은 분명히 살아낼 텐데, 기어코 살아가는 시작점까지만 목격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손을 다시 잡았죠.”

소설가 안보윤의 장편소설 『여진』(문학동네).

소설가 안보윤이 5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동명의 단편소설을 확장해 마침내 장편소설 『여진』(문학동네)을 펴냈다.

 

소설 주인공인 ‘나’와 누나는 층간소음 문제로 조부모를 잃은 뒤 비극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자책감 속에서 어느 덧 성인이 된다. 보복 살인자의 아들 역시 가정폭력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쓴 채 ‘슬픔을 지워주는 남자’로 성장한다. 어느 날 남자는 아버지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나’에게 병든 개를 맡기고 많은 보수를 건네고, 남매는 병든 개를 기르면서 희망의 문을 조금씩 그리고 힘겹게 열어 제치는데.

 

“개가 고개를 기울인 채 자신의 앞발 사이로 떨어진 얼룩을 들여다보았다. 개의 긴 주둥이에서 혀가 빠져나왔다. 잿빛 혀가 얼굴을 핥아 입속으로 가져갔다. 늙은 개가 여섯 개뿐인 이빨로 느릿느릿 얼굴을 씹어 삼키는 걸, 나는 개와 마주앉은 채 지켜보았다. 발밑으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그림자가 풀숲에 드리웠는데도 개는 울지 않았다. 두두. 작게 부르자 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주받았던 이름은 개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끝내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었다. 나는 어쩐지 안도하는 마음으로 개의 이마 위에 다시금 손을 얹었다. 개와 나의 그림자를 어둠이 완전히 삼킬 때까지 가만히, 그저 가만히 개를 쓰다듬었다.”(229쪽)

 

안보윤은 왜 이번 장편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작가는 앞으로 또 어디로 향하게 될까. 안 작가를 지난 8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그의 대답은 오랜 사색 끝에 비로소 나올 수 있는 사려 깊은 것이었다.

 

―숨진 조부모의 손자인 소년 ‘나’와, 살인자의 아들인 또다른 소년 김선오가 성장해 새로운 갈등의 축이 되는데.

 

“조부모의 손자인 소년 ‘나’와 또다른 소년(‘칠면조’ 김선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낙인이 찍힌 것과 시작점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조부모가 살해당한 피해자 손주인 소년은 누나와 함께 많은 소음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을 계기로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어찌 보면 암묵적 가해자이기도 하다. 미묘하게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경계선에서 낙인찍힌 채로 살아가는, 그래서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소년이었다. 또다른 소년 역시 제대로 부모에게 돌봄 받지 못하다가 윗집 할머니에게 성장 시작점을 열리는 경험을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그 사람을 죽임으로써 멘토를 잃어버리는, 가해자의 아들이지만 역시 할머니가 살해당한 정서적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이 서로 거울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모두 가해자이자 피해자이자 낙인찍힌 사람으로서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 지점에서 시작해보고 싶었다. ‘나’는 누나와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직시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 사건을 회피하는 쪽으로, 쓸모없는 혹은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으며, 삶을 가까스로 유지해 왔다. 반면 또다른 소년은 반대로 속죄하기 위해서 힘든 여정을 걸어왔던 사람이었다.”

 

소설은 성인이 된 ‘소년 나’와 ‘또다른 소년’ 김선오 모두 한편으로는 피해자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이 중첩돼 있다는 것을 적절히 보여준다.

안보윤 작가

―성인이 된 또다른 소년은 ‘나’에게 늙을 개를 맡기고 많은 보수를 주는 방식으로 속죄하려고 한다.

 

“사실 돈을 준다는 것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고, 저도 생각해요. 하지만 또다른 소년이 생각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작은 원룸에 사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아마 좀 성숙하지 못한 생각으로 속죄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울러 쓸모없다는 늙은 개를 케어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름 좀 위로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늙은 개를 등장시킬 때마다 쓸모없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많이 썼다. 나도 이제 쓸모없어 졌어, 라고 할머니가 말하면서 극도의 우울증에 빠지듯이 어떻게 보면 사회에서 생산 가능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의 쓸모 있다 쓸모없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사람을 대하면, 결국은 개장 속에 개들, 도구화하는 생물과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도 있었기에 이렇게 연결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 늙은 개가 얼룩을 삼키는 모습에선 주인공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주인공이 아무리 회피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사건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소년의 모든 삶 시작점에는 그 사건이 존재한다.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주목받고,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고,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다. 누나와 함께 있으면 그 일이 기억나거나 얘기해야 하기에 점점 떨어지게 되고. 필사적으로 그 사건과 멀어져 아닌 척하려 애쓰지만, 이 사람의 모든 삶의 패턴과 사유 속에 그 사건이 작동한다. 얼룩은 그 시작이 단순했는데, 일종의 트라우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은 얼룩이 아무 때나 나타나서 아무 때나 사라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얼룩은 항상 붙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늙은 개를 돌보는 행위와 누나와 다시 대화를 하면서 과거를 다시 직시하는 순간, 비로소 조금 시야가 열리게 된다. 우리가 정말 잘못했을까, 우리가 정말 죽인 걸까, 우리만의 잘못이었을까, 아이들은 모두 다 저렇게 잘 뛰고 있는데, 누군가 돌봄을 받아야 하는데.... 시야가 조금 열리는 그 지점에서 개가 얼룩을 삼키는 것으로써, 소년은 드디어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혹시 스스로 피해와 가해가 중첩된 사건을 경험한 적 있는지.

 

“눈에 띄게 큰 사건은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스스로 경계하고 말을 자주 곱씹는 편이다. 왜 하필이면 그 표현을 썼을까, 왜 하필 그 말을 그 타이밍에 하지, 하고 말을 쪼개보는 성격이 좀 있다. 아마 의도치 않았을 것임에도 혹시 나를 무시했던 게 아닐까, 하고 혼자 상처받는 지점도 있다. 제가 했던 말도 다시 되짚어본다. 생각치 못하고 불쑥 말을 뱉었는데, 혹시 상대방이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아까 그런 말을 했는데 그런 뜻이 아니야, 라고 사과하기도 한다. 서로의 입장을 고민해 보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처음에는 오해였는데, 해명하지 않는 동안 진실이 되거나 완전히 왜곡되거나, 다른 것이랑 붙여지면서 의도치 않은 형태로 가는 일들이 가끔 있더라.”

 

―작품을 돌봄의 관점으로도 읽을 수 있을까.

 

“독자분이 읽어줬으면 했던 부분 가운데 하나는 돌봄에 관한 것이다. 어린 남매도, 쓸모없다거나 사회에서 실패했기에 내쳐진 할머니 할아버지도 모두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서로 돌봐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우울증에 걸린 할머니가 안전한지 자꾸 확인해야 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역시 노년의 삶도 버거운데 아들 부부가 일을 해야 되니까 아이들 육아를 해야 한다. 서로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이 돌볼 수밖에 없는 일은 악의나 나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너무 미숙한 형태의 돌봄이 가장 최악의 결과를 가져 왔다고 상정했다. 나중에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남매가 늙은 개를 어쩔 수 없이 돌보기도 한다. 늙은 개를 돌보다가 자신도 돌보게 되는 지점에 이르면서 돌봄은 순환하게 된다. 어떤 때는 가장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고통 속에 밀어 넣기도 하지만, 자신도 돌보게 되기도 한다. 타인을 돌보듯 자신도 돌봐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살 자격이 있습니까, 라고 자꾸 질문 받는 늙은 개를 돌보는 남매가 희망을 얻게 되는 그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써 넣었다.”

 

―경찰과 ‘칠면조’의 신문 장면 속 대사도 찰지면서 깊이도 있더라.

 

“이 부문을 쓰면서 많이 읽고 많이 말했다. 글을 쓰고 소리 내서 읽다가 말이 꼬이면 고치곤 했다. 저는 소설 인물의 이력과 성격 등을 미리 짜놓고, 그 사람은 이렇게 제스처를 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머릿속에 만들어놓고, 그 사람의 생각대로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나의 캐릭터 이야기를 쓸 때에는 다른 챕터랑 같이 쓰지 않는다. 일단 한 사람이 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 사람이 된 상태에선 그 사람 파트만 집중한다. 이어서 다른 사람의 이력을 집중해 쓰고 다른 사람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 작업만 집중적으로 하는 식으로 쓰는 편이다.”

안보윤 작가

―이번 소설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이 장편을 써야 했는지.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날 것 그대로의 것을 쓰는 데 몰두했다. 세상에 가장 나쁜 부분이 있다면 조금도 미화하지 않고 가장 나쁘게 그려야겠다, 누가 봐도 이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할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들 알고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이 세계가 약간 기울어져 있고 삐뚤어져 있고 잘못되어 있는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있고, 누군가는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고, 누군가는 안전하게 방어하는 쪽으로 살아가고 있지, 라고 궁금증을 썼다. 왜 사람들이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을까, 라는 쪽에 더 무게를 뒀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가 뭐지, 라는 쪽으로 방향을 조금 잡았던 것 같다. 처음 우리가 모르기 때문일 거야 라고 의심했다가, 이어서 아는데 사실은 외면하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했다가, 이젠 그렇다면 직시하는 태도로 바뀌어야 희망과 진전이 있지 않나요 라는 질문까지 온 것 같다. 작품 속 인물들이 진실을 외면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일은 없었고, 가족과 떨어져 살 수도 있고, 프리랜서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과 삶을 직시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서로 어떤 방식으로 견뎌냈는지를 이해하거나 연대할 수 있고 진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모르는 척 일관해온 삶이었다면, 이제는 직시하고 한 걸음 나아가는 지점까지는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2, 3부가 중요했다. 고통스럽지만 직시해야만 비로소 발이 놓일 곳이 보인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소설 속에서 늙은 개는 계속 철장 안에 갇혀 있었기에 걷지 못하고 다리를 어디에 놓여야 할지도 모르다가, 후반부에 가서 다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알게 되고 흔들림 없이 걷는다. 여전히 생김새도 엉망이고 골반도 뒤틀려 있고 걸음도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분명하게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향해서 발을 내딛는 모습이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너희들이 제출한 방학 과제 가운데 가장 잘 쓴 단편을 가져 왔어,” 중학교 2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그해 8월 말, 여름방학 과제로 단편소설을 내주고 채점까지 마친 서상희 국어 선생이 교실에서 그와 급우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너희들 한 번 들어 봤으면 좋겠어.”

 

서 선생은 둥그렇게 눈을 뜬 학생들 앞에서 과제물 하나를 손에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바로 여중생 안보윤이 방학 숙제로 냈던 습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였다. 제목만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에서 따온 것으로,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없던 유치한 로맨스 이야기였다.

 

그는 서 선생이 이미 다른 반에서 자신의 과제를 낭독했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의 교실에서 다시 읽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 선생은 제법 긴 시간에 할애해 그의 습작을 끝까지 읽었다. 현재 강화도에서 작은 책방을 하는 서 선생은 작품을 다 읽어준 뒤 교실을 나갔다, 쿨하게.

 

“야, 네 소설 재밌었어.” 평소 그렇게 친하지 않던 친구가 안절부절 못한 채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의 옆에 다가온 뒤 말했다. 독자의 첫 반응. 짜릿했고 좋았다. 무언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과,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에 반응해 준다는 것 모두. 소설가 안보윤 문학의 원점이었다.

 

그는 이듬해 한 문화재단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산문으로 차상을 받았고, 문일여고에 진학해선 문예반에서 활동했다. 많은 손 편지와 일기를 쓰며 글쓰기를 수련했다. 사학과에 진학했던 대학 3학년 시절에는 복수전공으로 문학을 공부하면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설 습작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당시 평범하게 사는 것이 희망이었던 그의 고민이 이어졌다. 어떻게 할까, 대학원에 진학할까.

 

대학 4학년 시절, 그는 부족한 재능으로 소설을 쓸 경우 잃어버릴 것들을 생각해보고 그 목록을 노트에 쭉 적어 내려갔다. 안정적 직장 생활, 쏠쏠하게 쌓일 적금, 달콤할 것 같은 결혼, 그리고 집.... 이것을 글을 쓰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갔을 때와 비교했다. 어느 쪽이 행복할까. 이상하게, 다 잃어버려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창과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공부를 미리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오전에는 소설을 읽고 오후엔 소설을 썼다. 도서관에서 습작이라고 생각하고 연작성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를 쓰기 시작했다. 소설은 대학원 입학원서를 낼 때쯤 완성이 됐고, 문학동네작가상에 응모했다가 덜컥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1981년 인천에서 태어난 안보윤은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등단작 『악어떼가 나왔다』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실종과 성실, 편견 등의 테마를 가진 옴니버스식 소설이었다. 처음 아이가 실종됐다에서 시작해, 실종된 아이가 권력자의 아이였고, 권력자의 아이였지만 나약한 존재로 세상 밖으로 떠돌다가 가장 나약하고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이 더 낮은 위치로 떨어지는 이야기가 중첩된 구조였다.”

 

등단 이후 그는 소설집 『소년7의 고백』,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중편소설 『알마의 숲』,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 『오즈의 닥터』, 『밤의 행방』,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등을 창작했다. 자음과모음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명지대 사학과와 동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작품 세계를 조금 소개해 달라.

 

“처음에는 삶의 이면이나 삶의 테두리에서 밀려난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소외된 사람,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회 문제를 조금 더 예민하게 감각하고 이야기하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초반에는 조금 어둡고 날카로운 세계관이 많이 등장했다. 그런데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옮겨왔는데, 소설집 『소년7의 고백』과 이 소설 『여진』이 제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잘 맞는 소설인 것 같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테두리 밖으로 밀려났다, 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테두리에서 밀려났지만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초반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에서 끝났다면, 이후에는 『소년7의 고백』과 『밤의 행방』처럼 그럼에도 고통스러운 순간은 이렇게 상계돼 간다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이었다. 나아가는 지점을 제시하는 장편 『여진』까지 지금 현재의 제 소설관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글쓰기 전략이나 방법, 노하우가 있다면.

 

“오래 동안 써왔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니,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생각해 보니까 이야기에 따라서 태도가 바뀌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밤에만 글을 썼다. 초반에 소외된 사람들의 어두운 지점을 이야기할 때는 밤의 적막 속에서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단절돼 있는 상태에서 몰입하는 게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소통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부터 자꾸 빛이 있는 대로 나가게 되더라. 한낮에 카페에서 일이 잘 된다거나 한낮 대로변에 있는 곳에서 잘 된다거나, 사람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오히려 잘 된다거나, 글 쓰다가 지나가는 사람이나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면 활력을 얻게 된다거나. 이야기의 톤에 따라서 쓰는 장소, 몰입하고 싶은 시간대가 바뀌었다. 이 소설은 밝은 소설이 될 건가 봐, 이 소설은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톤에 맞춰서 장소나 집필 시간대가 바뀌어 갔다. 그때그때 제가 좋아하는 글이 써지는 장소에서 방향을 잡기도 했다. 소설을 쓸수록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초반에는 나는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쓰다보니까 쓰는 순간에도 마음이 바뀌고, 결말을 이미 냈음에도 결말을 계속 바꾸면서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는지 확인해가는 과정도 점점 길어졌다. 신중해져서 더 어려워지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고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김용출의 문학삼매경』을 읽을 때마다 그 질문에서 저한테 물어본 적이 많았다. 다른 작가들이 멋지게 자신의 세계를 이야기하니까 같이 고민을 했는데, 자주 바뀌더라. 저는 독자가 책을 다 읽은 다음에 다시 말하고 싶은 소설을 쓰면 좋겠다. 제 세계가 완성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그려낸 이야기와 던진 질문이 여기까지라고 한다면, 독자들이 읽은 다음에 나는 이런 게 괜찮은 것 같아, 내가 이 소년이었다면 뻔뻔하게 그냥 살 건데 뭐,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어졌다면 좋겠다. 제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그분에게 가 닿았다는 것이고, 그분이 그것에 대해서 나름 생각하고 떠올려봤다는 얘기니까. 그것이 동조이든 반박이든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든.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잘 읽었다고 접는 소설이 아니라, 소설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설이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엄청 노력해야 하겠지만.”

 

삶이 운명이나 새로운 변화로 향하는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소설가 안보윤은 오늘도 낮부터 오후 내내 인천 집의 서재나,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서 구겨진 마음을 롤러처럼 펴주는 카페에서 감각하고 있을 것이다. “놋쇠처럼 무거운 슬픔”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자리에 고이는 노란 불빛”을.

 

그리하여 대담한 손짓을 교신하고 온기의 깃발을 흔들 것이다. 끝없는 탐욕과 지혜를 잃어버린 외눈박이 분노, 결과가 뻔히 보이는 어리석음이 잉태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비극과 부조리, 그리고 그것의 여진으로 상처 받고 고통 받는 많은 이들에게.

 

당신, 아니 나와 우리 모두 언젠가는 회복의 길로, 또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랑의 힘을 조금만이라도 믿는다면, “애틋해 하는 마음” 한 자락만 가지고 있다면, 아니 포기하지 않는다면, 아니아니 그냥 살아만 있어 준다면.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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