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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키워드 된 ‘성평등’… 두 번의 선거 결과가 남긴 것 [정지혜의 빨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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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6-11 10:54:06 수정 : 2022-06-11 10: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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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와 이달 초 이뤄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올해 정치권의 두가지 빅 이벤트가 마무리됐다. ‘정권심판론’과 국면 전환에 대한 기대로 두 번 모두 국민의힘이 승리했지만 완전히 마음 놓을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두 번 모두 패배한 더불어민주당에도 선명한 위기감이 감돈다.

 

◇이제 대세는 ‘성평등’…정파성 넘어 진정성 대결

 

양당은 각각 이런 상황을 타개할 전략을 모색 중이겠으나 아직은 이렇다 할 개선이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안타까운 것은 어느 쪽도 매우 큰 폭발력과 외연 확장의 잠재력을 가진 성평등 의제 탐구에 진지하게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러 모로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구시대 습성과 결별하고 새로운 화두를 던지며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엔 성평등 이슈만한 것이 없다. 세계 각국이 이를 지속 가능한 사회, 가정·기업·국가의 경제성을 높이는 방편, 저출생·인구절벽 문제의 해법 등으로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윤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사회적 비용 감축 측면에서든 가장 큰 효과가 있을뿐 아니라 여러 사회 문제를 동시에 개선할 수 있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높은 가치라서다.

 

여성주의나 성평등 의제가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란 생각도 이젠 고루하다. 동등한 한 개인으로서 여성의 진정한 자립, 자유를 말하는 것이 어떻게 정파적일 수 있을까. 굳이 따지자면 오랜 남성 중심 사회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여성 정치’의 의미로 일종의 성 대결이 펼쳐지는 사안이지 진보 대 보수의 싸움이 될 영역은 아니다.

 

앞으로는 정파성에 관계 없이 어느 쪽이든 성평등 이슈를 제대로 선점하는 곳이 확실한 점수를 챙겨갈 것이다. 예를 들어 △아직 우리 사회는 성평등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인식 공유 △구조적 여성 차별이 여전히 존재함을 인정하기 △이를 제도·문화적으로 어떻게 개선해 갈 것인지 △성차별 사회에서 벌어지는 성별 기반 범죄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정의에 가까운지 등을 고민하는 것 말이다. 보수 진영은 성차별의 실체를 부인함으로써, 진보 진영은 조직 내 성범죄 발생 시 피해 여성 보호를 뒷전에 두는 식의 여성혐오적 집단주의 문화로 성평등 담론이 정체된 상태다.

 

성평등 관점을 강화하는 것은 윤석열정부가 기치로 내건 ‘공정과 상식’, ‘능력주의’에도 오히려 부합한다. 성차별적 관행으로 인해 여성이 동등한 출발선과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 채임에도 어떠한 보정도 없이 남성 일색 내각을 꾸리는 것이야말로 불공정이며 시대착오적이다. ‘능력이 부족한 여성에게 혜택을 주라는 말이냐’고 하기엔 뛰어난 능력을 사장시키고 있는 여성이 너무 많으며, 그것이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부유하는 2030 여성 표심, 누가 잡느냐가 관건

 

지난 두 번의 선거 결과에서 읽어내야 할 중요 포인트 중 하나는 ‘캐스팅보트로서의 2030 여성’이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중도층에서도 얼마나 표를 가져올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부동층 가운데 젊은 여성들이 확실히 세력화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현재 유권자 수에서 압도적인 60대 이상 연령층이 퇴장한 후에는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20∼30대를 제외하면 세대별로도 성별로도 지지 성향 격차가 크지 않은데, 성별 쏠림 현상이 뚜렷한 30대 이하에서는 여성들의 정치적 행동이 더 적극적인 상황이라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정치권과 언론 등은 ‘이대남(20대 남성)’이 캐스팅보트일 것으로 봤으나 대선을 통해 이는 오판임이 드러났다. 이번 지선에서도 20대 이하 남성 투표율은 29.7%로 전체 성별·연령대 가운데 최하위에 그쳤다. 이대남 위주 공약으로 승부를 보려 한 것, 여성들은 투표장에 가거나 뭉치기 힘들다고 본 것 등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판단 미스에 대해 당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선거 전까지 가시화된 온라인 여론과 실제 투표·득표율을 비교한 결과는 ‘이대남의 과대평가와 이대녀의 과소평가’로 정리된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유의미한 표 결집력을 보여준 건 오히려 ‘이대녀(20대 여성)’였다. 국민의힘 대선 전략이 반여성주의적 성향을 극대화하는 행보를 보인 데 비해 민주당은 뒤늦게나마 디지털성폭력 문제 해결에 앞장선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을 영입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기성 사회가 애써 외면해 온 20∼30대 여성 유권자들이 이번만큼은 더 절박하게 투표장에 감으로써 스스로 힘을 증명한 것이다.

 

대선 이후에도 박 전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으로 파격 발탁되자 이들은 민주당에 따라 들어와 응원을 계속했다. 이를 기회 삼아 민주당이 성평등 차원에서 완전히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며 혁신의 가능성을 앞세웠다면 지선 참패는 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선 막판 표심 결집의 공신이자 외연 확장의 시작점이 될 수 있었던 박 전 위원장의 입지가 강화되기는커녕 당내 비토 목소리에 의해 약화되는 것을 보며 많은 여성들은 다시 한번 체념했고, 민주당을 보던 중도층에서는 변화의 가능성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지선에서 최대 격전지로 꼽힌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아까운 패배를 한 김은혜 국민의힘 후보의 사례는 어떨까. 김동연 민주당 후보의 대역전극이 가능했던 데는 박 전 위원장과 함께한 20∼30대 여성 지지자들이 결집한 힘이 컸을 것으로 분석된다. 초박빙 접전 끝에 새벽 5시쯤 이뤄진 역전승이 2030 여성 표심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지난 대선에 이어 다시 한번 이들의 존재감을 드러낸 측면이 있다.

 

반면 김은혜 후보는 ‘최초의 여성 도지사’라는 타이틀을 내건 것에 비해 선거 과정에서는 이에 걸맞은 전향적이고 자립적인 여성상, 여성주의적 관점 등을 충분히 어필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가 ‘윤심’을 강조하며 남성 권력에 기대는 뻔하고 구태한 이미지보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좀 더 신선한 모습을 보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보수 진영에서는 출산, 육아에 치우진 여성 정책을 재고할 필요도 있다. 이제는 공고한 가부장제에 의존할 수 없는 시대임을 인정하고, 이에 속하지 않은 여성도 포용하는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합리적 보수 정당으로서 외연을 확장하려면 그동안 쌓은 반여성주의적 이미지부터 벗는 것이 급선무다. 대중이 볼 때 성평등 의제에서 진보 진영에 비해 갈 길이 더 멀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밑천 드러낸 ‘안티페미’ 전략, 이제 그만

 

이제는 안티페미니즘을 선거 전략이나 당이 추진할 주요 가치로 내걸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안티페미니즘은 전 세대를 아우르며 겨냥할 대의가 될 수 없음은 물론, 20대 남성 전반이 이 정서를 견인한다는 것마저 편견임이 밝혀지고 있다. 

 

언론재단 미디어연구센터의 최근 조사 결과 20대 남성 응답자 중 스스로를 이대남이라 생각하는 경우(23.2%)보다 아니라는 응답(36.2%)이 더 많았다. ‘이대남 현상’의 실체에 대해서는 ‘정치인, 인플루언서 등이 세간의 관심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 활용하는 세대·성별 갈라치기 프레임이다’는 응답이 83.2%로 가장 많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정치권과 언론이 일부 가시화된 의견에 불과한 온라인 커뮤니티, 뉴스 댓글 등이 전부인 양 과대대표해 다뤘기 때문이다. 세대와 성별을 막론하고 반여성주의는 그 자체로 환호하며 투표장까지 이끌 만큼 매력적인 가치가 아니며, 오히려 잃을 것이 더 많은 전략임이 입증되고 있다. 명분, 대의, 형평성 어느 하나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표(票)퓰리즘으로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다.

 

반대로 페미니즘이라는 전 세계적 시대정신은 승리 동력으로 이어질 만한 여성 표심의 확보에 이어 중도층에도 어필할 만한 가치다. 꼭 페미니즘이라는 명명을 하지 않더라도 성평등한 언행, 남녀 동수 실현을 위한 노력을 통해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도 페미니즘 찬반 논쟁을 벌이고, ‘우리 사회에 이제 성차별은 없다’는 식의 초라한 인식 수준으로는 표를 얻기는커녕 깎아먹기에 바쁠 것이다.

 

정치가들은 이 상황에서 성 대결 구도를 강화하기보다는 ‘성평등 사회’가 모두에게 안길 혜택을 중심으로 설득하고,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올해 치른 두 선거에서 20∼30대 여성과 남성이 확실히 대비되는 정치적 성향을 보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표심은 유동적이다. 민주당은 안심해선 안 되고, 국민의힘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의 경우 ‘탈이념적’ 성향이 높으며, 특히 여성 유권자들은 최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는 ‘정치 고관여층’으로 부상했다. 이들이 이번 지선까지 민주당 지지자로 있었던 것은 박 전 위원장의 용기를 통해 희망을 봤고, 국민의힘의 반여성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선택이었지 정당에 대한 열렬한 지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이 정작 필요한 행보는 자꾸 미룬 채 여성 표심을 ‘집토끼’ 취급하는 인상을 계속 준다면 당장이라도 철회될 수 있는 지지이며, 이미 일부는 박 전 위원장에 대한 무리한 당내 공격을 보며 돌아서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성평등 관점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의 변화와 혁신은 최대한 기존 정치인 이미지와 거리가 먼 여성이 주도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 면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20대 정치신인 박지현의 등장은 큰 의미를 가졌다. 

 

비록 지선 패배 이후 그를 포함한 비대위 총사퇴가 이뤄졌지만 박 전 위원장 입장에서 나쁜 상황인 것만은 아니다. 그가 내놓은 상식적 수준의 메시지와 혁신 요구조차 당내 반발에 직면하는 사태는 역으로 그의 존재감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지선 승리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비대위원장직을 맡는다는 것은 어차피 ‘독이 든 성배’와 같은 상황. 적당히 뭉개고 녹아들기보다 ‘강강약약’의 정신과 패기를 택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팬덤 정치’를 직접 언급하는 등 민주당이 오랫동안 묵힌 과제를 대중에 시의적절하게 각인시켜버린 정무감각 또한 고단수다. 그가 사퇴하더라도 대중은 민주당이 변화하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됐다는 점에서다.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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