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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우의미·중관계사] 미국의 중국 ‘문호개방’ 정책과 속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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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8-29 23:35:14 수정 : 2021-08-29 23: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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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환 직전, ‘중국 붐’이 워싱턴의 정·재계를 다시 강타했다. 20여 년 동안의 ‘장기 공황’이 지나고 미국 경제가 회복한 결과였다. 세계경제에서 30%를 차지한 중국의 비중이 6%로 하락한 반면 미국은 25%를 상회했다. 미국산 제품이 중국시장에서 호황을 누리며 재계는 다시 일본에서 중국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중국이 미국산 면제품의 반 이상을 수입하는 최대시장으로 부상한 덕이다.

정가에서도 재계의 로비활동이 강렬해졌다. 1895년 파나마운하의 건설이 촉구됐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1898년에 하와이, 괌과 필리핀을 합방하자 앨프리드 머핸은 저술 ‘해군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에서 이를 중국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할 것을 선전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의 경제이익 증대를 위한 외교 방도가 모색됐다. 이를 고안해낸 이가 윌리엄 록힐이었다. 그는 그리스,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대사를 역임하고 훗날 러시아, 터키와 중국 대사에 부임한 외교 베테랑이었다.

윌리엄 매킨리(왼쪽부터), 앨프리드 머핸, 윌리엄 록힐, 존 헤이. 출처:위키피디아

루마니아 대사 이후 그는 존 헤이 국무장관의 동아시아 고문에 임명됐다. 장관 지시로 그는 이른바 중국의 ‘문호개방정책’을 1899년 8월에 제출했고, 매킨리 대통령은 다음달에 승인했다. 미국의 정책 목적은 대중 무역의 증대가 아니었다. 대신 중국 시장에서 미국의 비즈니스 기회와 이익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었다. 당시 서구열강은 식민지정책으로 중국 영토를 이미 분할하고 점령했다. 반면 미국은 식민지 독립국가로 중국의 식민지화를 거부했다. 그래서 제안된 것이 열강들이 중국의 영토주권과 청조정의 통치주권을 인정하면서, 공정하고 공평한 여건에서의 경제 활동이었다.

다행히도 이를 영국이 먼저 수용했고 다른 열강도 따랐다. 원칙상으로 존중됐지만 제대로 지켜지진 않았다. 미국의 정책 사상은 중국의 대미 호감을 높이는 효과를 봤다. 미국의 속셈은 분열되지 않은 중국과 시장의 온전함에서 경제이익의 극대화를 노렸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미국의 중국시장에 대한 노림수의 기초가 확립된 것이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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