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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시집 박남준 “여기까지 와서야 세상이 멀다는 걸 알아차리다니”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입력 : 2021-05-19 09:00:00 수정 : 2021-05-18 18: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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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가 떴다/ 산 너머를 쫓아 내달리던/ 기억의 모서리가 낡아 둥그러진/ 옛날이 있다/ 둥글다는 것은 모나지 않다는 것인데/ 모나지 않은 것도 만질 수 없는 것인지/ 만질 수 없다는 것은 멀리 있다는 것/ 무지개가 멀다/ 여기까지 와서야 세상이/ 멀다는 것을 알아차리다니”(「무지개와 나」 전문)

 

무지개를 좇듯, 지리산 자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지 30년이 되는 박남준 시인이 최근 상재한 여덟 번째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걷는사람)의 시편들은 생태적 사유에서 우주적 사유까지 그 사유의 폭과 깊이를 크게 확장한 게 돋보인다. 전작 『중독자』(펄북스) 출간 이후 6년 만이다.

 

이번 시집 역시 여러 시편에 걸쳐 시인의 지리산 일상이 따스하게 녹아 있다. 전주한옥마을 지나 간이정거장 가는 길에 자꾸 침이 흘러내려서 손수건을 사러 갔다가 “아버님이 쓰시게요”라는 말에 잠깐 화가 났던, 어금니 두 개를 빼고 임플란트 치료까지 받은 그 날의 경험도.

 

“순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대답하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고 그러니까 저 말이 나를 가리킨 것이지 나 원 참~ 손수건 사지 않고 잰걸음으로 멀어지다가 그래 인정하자 여태 장가 한번 가지 못해 아버지 되지는 못했으나 이미 그 나이 차고 넘친다는 것, 손수건 다시 샀다 나도 인정했다”(「인정했다」 부문)

 

특히 표제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는 지리산 일상을 환상적으로 빚어낸 절편. 그러니까 잡초들이 무성해지지자 시인은 어쩔 수 없이 앞마당에 거친 왕마사를 깔았는데, 이후 앞마당을 지날 때마다 사막 사막 하는 소리에 새드 무비를 상영하게 됐다는. ‘서툰 배역’을 끝내고, 돌아갈 시간이 멀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대목에선 어떤 달관의 경지가 느껴진다.

 

“밤하늘에는 불시착을 한 채/ 이 별에서 살아온 그 시간이 상영될 것이다/ 오 새드무비♬~/ 서툰 배역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고통스러웠다/ 잔기침쟁이 장미와 사막여우처럼/ 길고양이 룰랄라도 충분히 길들여진 채/ 이별의 적응기를 끝냈으므로 나를 떠나갔다 하여/ 염려하지 않기로 한다/ 돌아갈 시간이 머지않다는 것을 안다/ 엔딩자막이 올라오며 점멸하는 활주로에/ 꽃을 피우지 못해 울던 사구아로 선인장의 곡성이/ 화면을 채울 것이다”(「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부문)

 

시인은 일상 속에서 세상과 삶의 이치를 예민하게 퍼올린다. 동백나무에 동박새가 찾아와 깃드는 것을 보고 “동박새가 찾아와 쉴 자리가/ 동백의 여백”임을 깨닫고 “여백을 가지고 있는가/ 누군가의 여백을 위해 스스로/ 그늘을 가득 채워 버렸는가”(「동백의 여백」)라고 스스로 또는 우리에게 묻거나, 사과나무가 딱새가 내려온 뒤에 첫 잎을 틔우는 것을 보고 사랑의 힘을 절감하는.

 

“통통통 발자국을 찍는다/ 휘이청 기다리는 먹이를 물고/ 사과나무에 앉아 망을 보다 푸릉 떠난 가지/ 오오래 흔들린다/ 흔들 흐은 들들들 손 흔든다/ 산다는 것 서로의 다리가 되어/ 건너는 것이구나/ 그리하여 어린 사과나무의 긴 잠이 깨었는가/ 꼬물꼬물 꼼지락거리며/ 눈꼽만 한 이파리를 내미네/ 한 잎의 초록도/ 사랑이 깃든 후에야 싹을 틔우는/ 저 아름다운 이치라니”(「아름다운 이치」 부문)

시인은 그동안 풀, 나무, 꽃, 새 등 집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농이겠지만, 오죽 했으면 소설가 한창훈은 “마당의 풀꽃 이름과 나무 둬 그루로 운을 떼고/ 텃밭의 채소와 벌레를 엮어/ 어눌한 말투처럼 풀어놓다가/ 새나 나비 등이 권속으로 간을 맞추면/ 얼추 끝난다”(「하소연하다」)고 했겠는가.

 

그런데 이번 시집에선 지리산과 주변을 멀리 떠나 몽골이나 카자흐스탄, 둔황은 물론 남아시아 인도, 남유럽의 산티아고까지 여행한 체험을 담아 시적 공간을 크게 확장시켰다. 몽골 대초원에서 별들의 무수한 공격으로 속절없이 쓰러지는 일행과 보드카라니.

 

“과녁이 되어 버렸다/ 가슴마다 화살이 되어 달려오는 별들은/ 왜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탄사와/ 학습되지 않은 욕들을 자아내는가/ 드디어 칭기스 보드카 병이 쓰러진다/ 흔들린다 비틀거리며 춤춘다/ 초원의 바다 그 수평선으로부터/ 그늘 깊은 사구 너머 지평선까지/ 길을 잃은 별 떼들이 온밤을 마구 질주한다”(「별 떼들이 질주하네」 부문)

 

간혹 시집 곳곳에 비어져 나온 시인의 삶이랄까 편린을 알아가는 재미도 솔솔. 해질 무렵, 사람의 말이 아닌 풍경이 주는 위로와 투명한 평화에서 시작이 시작됐다고 고백한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고 들려온 그 하루가 나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린 날 숙제가 남아 있었나 받아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詩作)했다”(「시작의 내력」 부문)

 

1957년 영광 법성포에서 태어난 시인은 그리하여 1984년 『시인』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중독자』 등을 펴냈다. 전주시예술가상, 거창평화인권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중앙승가대 교수인 금강 스님은 추천의 글에서 “한결같이 사는 모습이 수행”이라며 박 시인은 화두를 참구하듯 항상 시를 쓰고 노래하는 등 “시인은 삶이 시”라고 상찬한다.

 

시인은 오늘도 지리산 자락 심원재에서 시를 쓰듯 절을 하고, 절을 하듯 시를 쓸 것이다. “일상이 간절해야지/ 점점 작고 가벼워져/ 꽃배를 타고 건너가야지”(「절」) 하는 바람으로. 독자들이여, 함께 손을 모으고 간절해지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내 어리석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삶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비로소 눈먼 날들이 나를 여기 이끌었는지/ 살아 있으니 절합니다/ 내 안의 당신께 절합니다”(「내 안의 당신께」 부문)(2021.5.19)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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