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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세상 위로할 마음의 백신은 사랑과 평화의 노래”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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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1-14 06:00:00 수정 : 2020-11-14 15: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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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귀국한 가수 한대수
딸 양호 교육을 위해 줄곧 뉴욕서 생활
고희 넘기니 더는 창작의 여력이 없어
50년 음악 인생의 마침표 찍으려 귀국
미국 돌아가면 사진 작품 정리에 몰두
뉴욕에선 하루 900명씩 코로나로 사망
창작자로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 노력
14일 ‘하늘 위로 구름 따라’ 앨범 발표
자가격리·현실적 고통 익살스럽게 담아
국내 예술계 온통 BTS와 트롯만 넘쳐
둘 다 훌륭하지만 밥 아닌 반찬도 필요
우리나라도 다양한 록 팬들 늘길 바라
나훈아처럼 70대의 로커도 사랑해달라

얼마 전 대중음악계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수 한대수가 한국에 왔대요. 이번에 마지막 앨범을 낸다고 합니다.” 늘 인터뷰할 만한 인물 선정이 고민인 기자가 그에게 “좋은 분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던 터였다. 잘됐다! 한대수(72)가 누구인가. ‘한국 모던록의 창시자’, ‘한국 최초의 히피’, ‘한국 포크록의 대부’로 불린 1960, 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아닌가. 장발을 치렁치렁 늘인 채 기타를 치며 특유의 탁성(濁聲)으로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를 부르던 로커로 중장년 팬에게는 낯익은 이다. 번안 곡을 부르는 가수들이 판치던 때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였다.

세상 마음대로 살 것 같은 자유인이던 그도 세월 따라 달라진 운명은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수년 전에는 TV에 알코올의존증을 앓는 러시아인 아내를 돌보는 모습으로, 환갑 나이에 얻은 손녀 같은 딸을 육아하는 팍팍한 생활인으로 등장해 팬들을 아프게 했다. 사연 많은 그가 생애 마지막 앨범을 내려고 귀국했다니 궁금해 약속을 잡았다.

지난 2일 서울 신촌의 한 고시원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화폐’(그는 돈을 이렇게 부른다)가 부족해 호텔 대신 손바닥만 한 고시원 방에서 딸 양호와 부인 옥사나와 지낸다. “더는 포크록의 전설이 아니라 이제는 보시다시피 고시원에서 기타 치는 나이 든 로커”라며 헛헛하게 웃는다. 반나절 고시원과 인근 커피숍을 오가며 그의 사연 많은 가족사와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보헤미안의 삶, 50년 음악 인생을 들어봤다.

한대수는 1960, 70년대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음악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하루아침’ 등을 히트시킨 영원한 인디뮤지션으로 불린다. 그가 15집 앨범을 발표하기 위해 코로나19를 뚫고 4년 만에 귀국했다. 한대수는 인터뷰에서 “코로나로 인한 전 세계의 고통이 저의 고통으로 여겨져 곡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며 “세계인이 전대미문의 팬데믹 세상을 이겨낼 최고의 백신은 평화와 사랑임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제원 기자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는데.

“늦게 얻은 딸 양호(13) 교육을 위해 뉴욕에 간 지 4년 만에 귀국했다. 50년 음악인생에 마침표를 찍을 앨범을 내러 왔다. 15집 ‘하늘 위로 구름 따라’ 앨범을 14일 발표한다. 14집 ‘크렘 드 라 크렘’ 이후 4년 만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신음하는 세계인의 고통에 착안해 만든 블루스 록 ‘페인 페인 페인’과 자가격리 기간 아내와 딸에게 매 끼니 음식을 만들어주며 쓴 ‘멕시칸 와이프’, 돈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현실을 노래하는 ‘머니 허니’, 코로나19 시대에 익살스러운 유머를 담은 캠페인송 ‘마스크를 쓰세요’ 등을 담았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마지막 앨범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가.

“고희를 넘기니 더는 창작 여력이 없다. 음악은 예술 장르 중 가장 어렵다. 그래서 힘들다. 더는 좋은 작품이 나오기 힘들 것 같다. 저의 창작 캔버스가 하얀 게 아니라 이젠 까맣다. 채울 공간이 없다. 뉴욕에선 딸 키우느라 제대로 창작 활동을 못 했다. 그렇게 생활인으로 살던 중 전대미문의 코로나19가 터졌다. 뉴욕에선 하루에 900명씩 죽어 나갔다. 창작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영감이 밀려와 곡을 썼다. 그것을 발표하는 것이다. 전 가수이면서 작곡가이지만 이것만 한 게 아니다. 책도 10권 쓴 저술가이고, 방송도 7년 동안 진행했고,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사진 공부를 했다. 몇 차례 사진전도 열었다. 수십년간 국내 곳곳은 물론 뉴욕, 러시아 등에서 찍은 사진이 엄청나다. 대부분 필름 사진이다.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다. 뉴욕에 돌아가면 사진 정리하는 일을 할 계획이다.”

1977년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 그는 3인조 록밴드 ‘징기스칸 ’의 리더로 활동했다. 한대수 제공  

―청소년기의 고독과 우울감이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고 늘 얘기하는데.

“제 삶이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고 하는 이들이 많다. 서울과 부산에서 30년, 뉴욕에서 40년을 살았다. 남부러울 게 없는 부유한 집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신학대 초대 학장이었고, 아버지는 핵물리학자였다. 그런데 유년시절 미국에 유학 간 아버지가 돌연 실종됐다. 어머니는 재가했다. 갑자기 고아 처지가 돼 10살 때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선 저택에 혼자 살았다. “저 넓은 정원 뒤를 잇는 장미꽃밭/ 높고 긴 벽돌담의 저택을 두르고/ 앞문에는 대리석과 금빛 찬란도 하지만/ 거대함과 위대함을 자랑하는 그 집의/ 이층 방 한구석엔 홀로 앉은 소녀/ 아아, 슬픈 옥이여/ 아아, 슬픈 옥이여.” 당시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쓴 ‘옥의 슬픔’이란 곡이다. 옥이가 바로 저다.

귀국해 부산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늘 외로웠다. 부모의 부재가 컸다. 그래서 딸 양호에게 집착한다. 양호에게는 저 같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서다. 젊은 시절 음악이 최우선이었다면 이제는 딸이 최우선이다. 대학 졸업 때까지 화폐를 벌어 뒷바라지해야 한다. 이젠 생활인 한대수다.”

―60년대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뒤집어 놓은 이방인’으로 언론에 회자됐다. 늘 평탄하지 않은 음악인의 삶이라고 여겨지는데.

“1968년 미국에서 ‘바나나 보이스’라는 이름의 듀엣 활동을 하다 귀국했다. 귀국 첫 무대가 무교동 ‘세시봉’이었다. 김동건이 사회를 본 ‘명랑백화점’에 첫 TV 출연을 했다. 그런데 장발을 치렁치렁 날리며 기타를 치는 모습이 당시에는 문화적 충격이었나 보다. ‘한국을 떠나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화성인 보듯 했다. 한 매체는 ‘최초의 히피, 한국에 등장하다’는 기사를 냈다. 장발이라 TV 출연뿐 아니라 공식 무대 활동도 금지됐다. 그러다 보니 주로 대학가와 다운타운에서 활동했다. 생계를 위해 디자인포장센터에 취업도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군에 입대했다. 해군으로 3년 복무하고 나서 1974년 1집을 냈다. 그때까지 가수가 아닌 김민기 ‘바람과 나’, 양희은의 ‘행복의 나라’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듬해 2집 ‘고무신’을 냈으나 미국으로 도망가야 하는 신세가 됐다. 재킷 사진 중 철조망에 걸려있는 흰 고무신이 재소자의 고무신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 ‘체제 전복적’이라며 강제 회수되어 파기됐다. 음악인으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어 1977년 뉴욕으로 쫓기듯 갔다. 그곳에서 3인조 록밴드 ‘징기스칸’의 리더로 활동했다. 그 후에도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다 보니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삶의 힘든 고비마다 음악이 찾아왔다. 음악은 숙명이다. 50년을 하면서 앨범 15집, 150여 곡이 남았다.”

―창작의 궁극적 주제는 늘 사랑과 평화라는 지론을 펴고 있는데.

“제가 미국에 머물던 1964년부터 1975년 사이에는 대중문화가 만개할 때였다. 운 좋게도 여기서 위대한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얻고 음악을 제대로 배웠다. 비틀스로부터 레너드 코언, 밥 딜런, 피터 폴 앤 메리 등 위대한 아티스트들이 부르짖는 것은 한결같다. 서로 사랑하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시안이든 관계없이 평화롭게 지내자는 것이다. 요즘 같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석 달 안에 백신이 나온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다.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본다. 창작자 입장에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세계인을 위로할 마음의 백신이 필요하다. 가장 좋은 백신은 아티스트들이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것이다. 국가 간 장벽을 쌓지 말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자. 선진국은 후진국에 기술을 제공하고 돕자. 슈퍼파워 미국과 중국은 대결하기보다는 코로나 극복을 위해 힘을 합하라고 노래로 촉구하자. 저도 음악인으로 그런 노력에 작은 힘을 보탤 것이다.”

―방탄소년단(BTS) 병역특례 허용을 두고 국내에선 논란이 많다.

“저는 해군으로 병역을 마쳤다. 군 시절 힘들었다. 군기가 셌다. 구타도 심했다. 해군선에는 나무 몽둥이가 없으니 쇠몽둥이로 때렸다. 제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병역은 국민의 신성한 의무다. 예외 없이 군대를 가야 한다. 그러나 창작자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생각이 다르다. 18∼28세 즈음이 창의력이 가장 왕성할 때다. 저도 그간 쓴 150곡 중 80%를 이 시기에 썼다. 마흔이 넘어선 별로 없다. 음악은 한번 꺾이면 회복이 안 된다. 세계적 스타로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고 노래하다 어느 날 전혀 환경이 다른 군대에서 총 쏘고 철책 근무하고 내무반 생활 하다보면 머리가 굳어버린다. 감성이 죽어버린다. 제가 실제 겪었다. 미국이나 영국은 군대에 안 가니 세계적인 록스타가 나오는 것 아닌가. 순전히 창작자로서의 제 생각이다. 당국에서 보시면 참고만 해 달라.”

―국내에는 유독 록 팬이 적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는데.

“4년 만에 귀국해보니 국내 대중예술계는 BTS와 트롯뿐이다. 록과 같은 장르가 낄 공간이 없다. 고기와 밥뿐이다. 둘 다 훌륭하지만, 반찬이 필요하다. 록은 반찬 중의 하나다, 일본의 록 시장이 5000만명이면 우리나라는 200만명에 불과하다. 다양한 장르가 사랑받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우리나라도 다양한 록 팬들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 앨범을 낸다고 하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나.

“불행한 가족사로 어린 시절 정체성 혼란이 컸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는 양키로 놀림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눈 찢어진 아시안으로 취급받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종이배나 다름없었다. 여태껏 제 삶이 한순간도 고통스럽지 않은 적이 없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게 창작 활동의 자양분이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외친 한대수로 기억해줬으면 한다. 이번 15집에 반응이 좋았으면 하는 욕심도 있다. 트롯의 나훈아 선생이 저보다 연배가 위인데 이번에 대박이 났다. 이 70대 로커도 국민이 사랑해주시면 고맙겠다.”

그를 인터뷰한 날은 미국 대선일 하루 전이었다. 뉴요커로 40년을 미국에서 살며 그들의 삶과 문화에 해박한 그에게 대선 전망을 물었다. “바이든 후보가 어렵게 이기는데 트럼프가 승복하지 않아 당분간 혼란이 일 것 같습니다.” 개표 결과, 정확히 그의 말 그대로다. 놀랍다.

신촌 고시촌 작은방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한대수. 박태해 선임기자 

인터뷰 후에 영상과 책을 통해 한대수를 ‘공부’해 보니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대중예술인으로 규정하기에는 부족하다. 기후와 환경, 4차산업, 인권, 청소년 문제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한 깊이 사유하는 철학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코로나 난리 통에 낸 15집이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가 ‘화폐’를 좀 벌어 서울에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가수 한대수는… ●1948년 부산 동래 출생 ●1958년 도미 ●1966년 미국 뉴햄프셔대 수의학과 입학 ●1967년 뉴욕 사진학교 사진 전공 ●1968년 서울 세시봉 공연, 싱어송라이터로 데뷔 ●1970년 대한민국 국전 사진 부문 수상, 한국디자인포장센터 3급 공무원(디자이너) ●1974년 1집 앨범 ‘멀고 먼 길’ 발표 ●1975년 2집 ‘고무신’ 발표 ●1988년 LA 버뱅크에서 사진관 매니저 활동 ●1989년 한국 귀국, 3집 ‘무한대’ 발표. ●1990년 4집 ‘기억상실’ 발표 ●1991년 5집 ‘천사들의 담화’ 발표 ●2003년 KBS 가요대상 공로상 ●2005년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2010∼20017 CBS라디오 ‘손숙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진행자 ●‘나는 매일 뉴욕 간다’ ‘올드보이 한대수’ 등 다수 저서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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