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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50) ‘오이디푸스 왕’ - 추락하는 자의 위대한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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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8-03 08:00:00 수정 : 2020-08-02 21: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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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괴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내 테바이의 영웅이 되고 왕위에 올랐으나 신탁이 예언한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지 못한 오이디푸스의 인생 역정을 담았다. 당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 작품을 비극의 전형적인 모델로 꼽았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 지금도 널리 읽히고 무대에 올려진다.

 

테바이에 역병이 돌자 오이디푸스 왕은 처남 크레온에게 아폴론 신전에 가서 테바이를 구할 방안을 물으라고 지시한다. 신전에서 돌아온 크레온은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범인을 벌주라는 명령을 들었다고 전한다.

 

“사람을 추방하거나 살인을 살인으로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피가 우리의 도시에 폭풍을 몰고 왔다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내 이르노니, 그 살인자가 누구이든 간에 내가 권력과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말을 건네서는 안 되며 … 그 자는 우리에게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모두들 그 자를 집 밖으로 내쫓도록 하라.” 

 

오이디푸스는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른다. 테이레시아스는 “바로 그대가 이 나라를 더럽히는 불경한 자”라고 한다.

 

“그는 같이 살고 있는 그의 자식들의 형제이자 아버지이며, 그를 낳아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그의 아버지의 침대를 이어받은 자이자 그의 아버지의 살해자임이 밝혀질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이 왕위 찬탈 음모를 꾸며 ‘사악한 예언자’를 부추겼다고 의심한다. “그 자가 그대와 결탁하지 않았더라면 라이오스의 죽음이 나의 소행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캐기 시작한다.

 

라이오스의 부인이었고 이제 오이디푸스의 부인인 이오카스테는 과거사를 털어놓는다. 라이오스는 아들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신탁을 듣고 갓 태어난 아이의 두 발목을 같이 묶은 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인적 없는 산에 갖다 버렸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다.

 

하지만 더 큰 불안감에 휩싸인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를 묻고는 테바이에 오기 전 길에서 사람을 죽인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이 코린토스 왕 폴뤼보스의 아들로 자랄 때 누군가 ‘진짜 아들이 아니다’라고 해서 아폴론 신전에 갔는데 ‘어머니와 몸을 섞고 아버지의 살해자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코린토스를 떠나 줄곧 돌아다니다가 테바이에 오게 됐다고 말한다.

 

그때 코린토스에서 사자가 찾아와 폴뤼보스가 노환으로 숨졌으니 신탁이 맞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에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인간은 우연의 지배를 받으며 아무것도 분명하게 내다볼 수 없거늘 그러한 인간이 두려워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되는 대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어 사자는 자신이 산에서 가축들을 돌볼 때 라이오스의 가신(家臣)이던 다른 목자에게서 두 발목이 묶인 아기를 받아 폴뤼보스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부은 발’이라는 뜻의 오이디푸스가 된 것이다.

 

이오카스테는 ‘일고의 가치가 없고 다 부질없는 짓’이라며 이 일을 더 추궁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이디푸스는 “이 일을 분명하게 밝혀내지 말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뿌리친다. 오이디푸스는 마지막으로 아기를 사자에게 넘겨준 목자를 불러 사실을 확인한 뒤 이렇게 말한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빛이여, 내가 그대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 되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서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음이라.”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오이디푸스는 부인의 옷에 꽂힌 황금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알을 찔러 장님이 된다.

 

“만일 내 눈이 멀쩡하다면 저승에 가서 아버지와 불쌍한 어머니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 이런 오물을 스스로 뒤집어쓰고도 내 어찌 바른 눈으로 이 백성들을 볼 수 있겠는가?”

 

소포클레스

그는 왕위를 크레온에게 넘기고 오래 전에 부모가 갓 태어난 그를 버린 산으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는 의도치 않은 비극적 운명에 휘둘리지만 단순한 운명의 제물로만 볼 수 없다. 파멸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려고 했으나 그가 진실을 말할 것을 강요했다. 운명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진실과 대면했다.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도 죽음을 택하지 않고 스스로 장님이 되어 끔찍한 고통과 오욕을 감내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운명에 의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그 운명을 떠안으면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낸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고전 번역가 천병희는 “진정한 의미의 비극이란, 신 또는 외부로부터의 의지와 인간 또는 내부로부터의 의지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절망적이고 가망 없는 투쟁에서도 타협을 거부하고, 파멸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위대함과 존엄을 지키고 보여주는 데 있다”고 했다. 국문학자 김열규는 저서 ‘독서’에서 “추락하는 자의 위대한 송가가 바로 정통 비극”이라며 “인간의 한계가 인간을 더없이 존엄하게 할 수도 있다는, 그 무서운 가르침을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온갖 의혹만 난무하고 진실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의혹과 관련된 많은 이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국민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오이디푸스 왕’을 읽어야 할 때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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