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인근 성공회 교회에서 성경을 들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평화적인 시위대를 강제해산시킨 것을 두고 정계와 종교계 등 각계각층의 비난이 거세다. 약탈과 폭력 시위는 잠잠해지고 있지만, 전날 군 전투용 헬기가 동원된 데 이어 29개 주에 주방위군이 2만명 가까이 배치되는 등 경계태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일(현지시간)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수도 워싱턴에 있는 가톨릭 시설인 세인트 존 폴 2세(요한 바오로 2세) 국가 성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그는 전날 평화적인 시위를 하던 시민들을 경찰과 비밀경호국 요원들이 최루 가스와 고무탄을 동원해 강제로 밀어붙이도록 한 뒤 백악관 인근의 세인트 존스 교회를 방문해 성경을 들고 기념사진 촬영을 하는 이벤트를 강행했다.
가톨릭 워싱턴 교구장인 윌턴 그레고리 대주교는 이날 성명에서 “모든 사람의 권리를 수호하는 우리 종교의 원칙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가톨릭 시설을 남용하는 상황을 용납하는 건 비난받을 만하다”고 비판했다. 세인트 존스교회 목사인 지니 저바시는 CNN과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교회 방문에 대해 “신앙을 가진 모든 이들에 대한 신성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이날 성경을 들고나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치유의 지도자’가 되라고 일갈했다. 조 바이든 전 부통령도 이날 80일 만에 공개 석상에 등장해 발표한 성명에서 “내가 완벽한 대통령이 될 수는 없지만, 증오를 부채질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또 군 전투용 헬기를 동원해 시위대를 겁주고 해외파병지 3곳에 맞먹는 수준으로 방위군 투입 규모를 늘리는 등의 강경 대응에 공화당의 수전 콜린스, 벤 사스, 팀 스콧 상원의원들도 이례적으로 비판했다.
이날 현재 28개 주와 워싱턴에 주 방위군 병력 2만400명이 배치돼 있고, 이는 전날보다 3000명가량 늘어난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CNN은 “이번 주 방위군 투입 규모가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미군 병력과 거의 동일하다”고 전했다.
특히 워싱턴 인근 지역에는 헌병부대와 보병 대대 요원을 포함한 현역 육군 병력 1600명이 배치됐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워싱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인근 일부 주에 주 방위군 파견을 요청했으나 버지니아,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주 등 민주당 출신이 주지사인 4개 주가 거절했다고 미국 언론이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 정부의 요청 없이 대통령 판단에 따라 연방군을 투입할 수 있는 ‘폭동진압법’ 발동을 검토하고 있다.
미군 퇴역 장성들은 워싱턴에서 다목적 헬기인 블랙호크(UH-60)와 재난 구호 임무를 수행하는 라코타헬기(UH-72) 등이 저공 비행하면서 시위대를 위협하자 트럼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마틴 뎀프시 전 합참의장은 트위터를 통해 “미국은 전쟁터가 아니며 우리의 시민은 적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라코타 헬기 동원에 대해 공군 변호사 출신 레이첼 밴란딩험 사우스웨스턴 법대 교수는 “적십자 상징의 오용은 평화 시기라 할지라도 (전시 희생자 보호를 위한) 제네바협약(적십자협약)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과 뉴욕 등 주요 도시의 시위 참여자는 연일 증가하고 있으나 약탈, 방화 등 폭력 행위는 다소 줄어드는 양상이다. 플로이드 추모 행사는 4일 그가 숨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시작되며 9일 휴스턴에서 열리는 비공개 장례식이 이번 시위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그의 장례식에는 바이든 전 부통령까지 참석 의사를 밝히는 등 관심이 집중되면서 항의 시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한편 플로이드의 부인 록시 워싱턴은 이날 6살 딸 지아나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플로이드는 좋은 남자였다. 경찰이 나에게서 그를 앗아갔다”며 “지아나는 이제 아빠가 없다. 플로이드는 지아나가 어른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됐다”고 흐느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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