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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렇게 쓰는 거라네”… 작법론을 설파하다

입력 : 2020-04-01 02:00:00 수정 : 2020-03-31 23: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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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순간들’ 펴낸 박금산 작가 / 길어야 10쪽 내외 분량 콩트 25편 담아 / 단계 따라 발단·전개·절정·결말로 나눠 / “발단은 9회말 투아웃 만루 상황이 제격 / 평범한 1회로 시작해선 독자 관심 못 끌어 / 절정은 홈런 또는 삼진으로 담아내야 / 빼어난 절정 있어야 ‘우아한’ 결말 이어져”

그는 베란다에 이불 빨래를 널고 외출한다. 이웃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빨래를 자주 하시네요.” 그가 말한다. “이 녀석이 매일 실례를 하네요.” 그는 강아지의 목줄을 당긴다. 강아지는 그의 곁으로 와서 보도블록에 소변으로 냄새 점을 만든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만진다. 빨래는 아직 축축하다. 그는 식탁으로 다가간다. 그는 식탁 위의 쟁반에 놓아둔 야뇨증 치료제를 먹는다.(36,37쪽)

소설가 박금산이 새로 펴낸 소설집 ‘소설의 순간들’(비채) 가운데 발단에 해당하는 소설 ‘어떤 개의 쓸모’ 전문이다.

 

삶이 있는 곳에는 이야기, 소설이 있다. 소설은 삶보다 짧다. 단편소설은 더 짧고, 1000자가 넘지 않는 플래시 픽션(아주 짧은 엽편소설(葉篇小說), 콩트)은 더더욱 찰나적이다. 그런데, 소설은 어떻게 시작되어 전개되고 고유한 생명력까지 얻는 것일까? ‘소설의 순간들’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박금산만의 대답이다. 그는 플래시 픽션 스물다섯 편을 ‘1부, 2부, 3부, 4부’로 나누는 대신 이야기의 단계에 따라 ‘발단, 전개, 절정, 결말’ 총 4부로 나누어 소설을 배치했다. 짧게는 한두 쪽, 길게는 10쪽에 달하는 플래시 픽션이야말로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 단면을 들여다보기에 더없이 훌륭한 형식임을 작가는 입증해낸다. 여기에 자신만의 소설론과 작법론을 덧붙였다. 색다른 소설집이다.

 

그에 따르면 ‘발단’은 9회 말 투 아웃 만루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작가는 타자를 잡아야 하는 투수이다. 1회 초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 발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독자들이 다 도망간다. 독자들이 작가가 9회 말 투 아웃 만루 상황에 서 있는 투수임을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긴장된 상태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발단은 시작이 아니다. 소설의 시작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아니다. 투수는 타자를 잡을 방법을 정해놓고 던져야 한다. 대충 공을 던지고 타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간을 보는 게 아니라 타자의 반응이 예상되어 있는 어떤 공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이긴다. 9회말 투 아웃 만루 상황에서 던지는 첫 공, 소설의 발단이다.

 

‘전개’는 서핑에서 보드 위에 올라서는 과정이다. 엎드려서 팔을 젓다가 파도의 힘을 이용해 두 발로 일어나는 것이다. 보드는 전진하고, 몸은 상승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주변을 둘러보아야 한다. 좋은 전개는 따로 떼어놓았을 때 독자가 앞뒤를 상상하면서 흥미를 느끼게 한다.

 

‘절정’ 부분은 소설에서 가장 풍부해야 한다. 9회말 투 아웃 만루에서 홈런을 치거나 반대로 삼진을 잡아내는 것이다. 더 이상 진전이 있을 수 없는 상태, 끝, 스키다이빙에서 날아가는 것. 절정은 끝이지만 절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스키다이빙이 멋진 것은 비행 다음에 반드시 착지가 있기 때문이다. 선수가 안전하게 착지할 것을 알기에 스키다이빙을 마음 놓고 보면서 감탄하는 것이다. 결말로 가는 길은 반드시 뚫려 있어야 한다.

 

좋은 ‘결말’은 외길이다. 절정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결말로 가는 길은 좁고 분명하다. 발단에서 출발한 소설은 전개와 절정에 의해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절정에서 이어지는 결말은 딱 한 길밖에 없다. 자연스러움이 그것이다. 서핑에서 초보는 파도 위에 올라타는 것까지만 연습한다. 그러나 고수가 되면 파도에서 빠져나오면서 자기가 탄 파도를 바라보는 여유를 갖는다. 자기가 탄 파도는 이미 지나가서 거품이 되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절정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말을 우아하게 다진다. 결말은 이야기를 주도한 갈등이 해소되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다. 절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말이 가장 좋은 결말이다.

저자의 조언은 읽는 즐거움을 찾는 독자뿐만 아니라 콘텐츠를 창작하는 사람에게도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박금산은 책을 통해 독자들이 앞과 뒤의 이야기를 상상해보고, ‘탁’ 스파크가 튀는 이야기의 어떤 순간을 함께 느끼고, 궁극적으로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게 되기를 바란다고 머리말에 적었다.

 

문학평론가 김나영은 “이 책이 작법서의 역할도 충분히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머리말부터 맺음말까지 읽고 났을 때 받게 되는, 이것이 하나의 잘 짜인 이야기 같다는 인상 때문일 것”이라며 “작법에 대해서, 혹은 소설에 대해 쓴 연작소설이라 해도 좋다”고 호평했다.

 

스물다섯 편의 단편을 손 가는 대로 하나씩 읽으며 음미할 수 있다. 작가가 분류한 단계에 따라 읽어도 되고, 소설론을 먼저 읽고 소설을 읽으며 서로 비교하는 것도 색다른 독서 경험이 된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 박금산 작가는…

 

1972년 여수에서 태어난 박금산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공범’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장편소설 ‘존재인 척, 아닌 척’ ‘아일랜드 식탁’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 연작소설 ‘바디페인팅’, 소설집 ‘생일선물’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등을 발표했고, 2016년 오영수문학상을 받았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제가 이야기의 공간을 만들고, 편집자는 책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내놓았으니 독자들이 그 공간을 소유하며 ‘다행이다’라고 느낀다면 우주적인 기쁨이 일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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