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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깃발', 그후 75년… "그런 비극 다신 없어야"

입력 : 2020-02-22 16:00:00 수정 : 2020-02-22 10: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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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역사상 최악' 이오지마 전투 희생자 추모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왼쪽)과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2차 대전 추모관에서 열린 ‘이오지마 전투 75주기 추모식’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미 국방부

지금으로부터 꼭 75년 전인 1945년 2월19일 약 400척의 배를 타고 온 미국 해군 및 해병대 장병 7만여명이 태평양의 조그만 섬에 상륙했다. 일본 영토에 속한 이 섬의 이름은 ‘이오지마(Iwo Jima)’, 한자로는 ‘유황도(硫黄島)’였다. 면적이 10㎢가 좀 넘을 이 비좁은 섬이 미군 역사상 ‘최악의 치열한 전투’로 기록될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가 되리라고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미 국방부는 이오지마 전투 75주기를 맞아 지난 19일(현지시간) 수도 워싱턴의 제2차 세계대전 추모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고 21일 밝혔다. 미군의 ‘서열 1위’ 장성 마크 밀리 합참의장(육군대장)이 참석해 추모사를 했다. 밀리 의장은 부친이 2차 대전 당시 해병대원으로서 이오지마 전투에 직접 참전한 경험이 있어 더욱 뜻깊었다.

 

1945년 2월19일 이오지마 해안에서 시작한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36일간 이어져 3월 하순에야 미군 승리로 막을 내렸다. 양국 군대를 통틀어 전투 참가자의 약 50%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일본군은 미군의 이오지마 상륙 당시 2만2000여명이 섬의 방어에 투입됐는데 전투 후 살아 남은 이는 겨우 1000명에 불과했다. 미군도 7만여명 중에서 2만8000명이 훨씬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얻은 값진 승전이었던 만큼 전투 참가자 27명이 미군에서 최고 영예로 통하는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이오지마의 어느 고지를 점령한 미 해병대원들이 성조기를 단 대형 깃대를 세우는 장면은 미국인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 사진으로 통한다.

 

이오지마 전투 당시 미 해병대원들이 성조기를 세우는 모습. 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모티브가 됐다. 미 국방부

이는 할리우드 스타 출신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만든 연작영화 ‘아버지의 깃발’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 잘 그려져 있다.

 

밀리 의장은 추모사에서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수많은 미국인이 ‘더 나은 평화’를 위해 싸웠다”며 당시 참전용사들과 미국 내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주력한 근로자들을 일컬어 ‘가장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라고 칭송했다.

 

2차 대전 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냉전기 소련(현 러시아)과의 냉전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두 차례 세계대전와 같은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 후 러시아와 중국이 새롭게 군사적 강대국으로 떠올라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면서 세계의 평화가 다시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시각이다.

 

밀리 의장은 “이오지마 전투와 같은 비극이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된다”고 단언한 뒤 “또다른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 비극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인 만큼 이제 우리는 그것을 막을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제복을 입은 미국의 모든 군인은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데 헌신할 것”이라고 거듭 다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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