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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철권통치 시절 억눌린 청춘들의 자화상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10-01 06:00:00 수정 : 2019-09-30 21: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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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하길종 감독 ‘바보들의 행진’ /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최인호 원작 / 청년 세대 고뇌와 좌절 스크린에 담아 / 美 유학파 출신 하 감독의 야심찬 연출 / 군사정권 그물망 검열 수난 딛고 흥행 / 강요된 ‘명랑’ 정서 이면에 ‘조울’ 배치 / 1970년대 중반 한국사회 이해 대표작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로 시작하는 가수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은 한 영화의 주제가였다. 한국 고전영화에 관심 있는 올드 팬이라면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1984)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실상 이 노래가 주제가로 쓰인 영화는 따로 있다. 하길종(1941∼1979)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이다. 하길종은 1970년대 한국영화계 최고의 문제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4·19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소위 4·19 세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 UCLA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영화계로서는 드문 인텔리였다. 그는 귀국 뒤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우화와 모더니즘을 결합한 ‘화분’(1972)과 반전적인 메시지를 담은 ‘수절’(1973)을 야심 차게 연출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폭력적인 검열 탓도 있었고,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감독의 미학적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길종은 청춘들의 고뇌와 좌절을 다룬 세 번째 연출작 ‘바보들의 행진’으로 일약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상영과 재상영까지 이뤄진 강압적인 정부의 방해와 검열을 뚫고 만들어진 1970년대 걸작 중 하나다. 그는 이즈음 이장호, 이원세, 홍파 등 신진 영화감독들과 영상시대라는 단체를 만들어 새로운 한국영화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7편의 영화만 남겨 둔 채 1979년 3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미국 유학 시절의 하길종 감독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청년, 청년, 청년

어느 시대나 청춘은 불안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에선 가진 것도 없고 충분한 기회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정치와 사회에 대한 불만, 정의감과 열정, 욕망과 활기가 들끓고 있는 상태. 이 활기와 에너지는 제도권에서 수용돼 발전의 발판이 되기도 하고, 때로 지배계급을 뒤엎는 혁명의 불길이 되기도 하며, 강력한 위로부터의 압박에 기저에 잠재돼 뒤끓는 상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1970년쯤부터 한국사회에는 서구 68혁명의 영향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었는데, 무엇보다 혁명을 주도했던 서구 청년 세대의 높아진 자의식이 한국의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스튜던트(student·학생) 파워’란 말이 유행처럼 퍼졌고, 한국사회 변혁을 위한 청년 세대의 에너지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구의 혁명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권위주의가 본격화됐다. 초기 정치와 사회 변화를 모색하던 청년 세대의 에너지는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강화되면서, 자신들만의 게토화된 문화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통블생’(통기타, 블루진, 생맥주) 문화이고, 몇 년 전 다시 인기를 끌었던 세시봉 그룹이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이 시기 청년 문화는 억압적 공기 속에서 자유를 향한 숨구멍과 같은 역할을 했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병태와 영자가 입맞춤을 하는 마지막 장면.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당시 청년 문화를 이끌었던 것은 김민기와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이장희 등 대중가요계의 뮤지션들이었지만, 범위를 좀 더 넓히면 이장호와 하길종, 이원세와 같은 영상시대 영화감독들이 포함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소설가 최인호가 있었다. 최인호는 당대 청년 세대의 감수성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소설 상당수가 영화화됐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이장호의 충격적인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과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하길종은 원작자 최인호뿐 아니라 강근식, 송창식 등 당시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함께한 뮤지션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의 조울

서울의 한 대학 철학과에 다니는 병태(윤문섭)와 영철(하재영)은 그룹 미팅을 통해 다른 대학 불문과의 영자(이영옥)와 순자(김영숙)를 알게 되고 만남이 이어진다. 어느 날 영자는 선본 남자와 곧 결혼할지도 모른다며 병태에게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통보한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술만 마시면 고래를 찾으러 떠나겠다고 하는 영철은 순자를 좋아하지만, 순자는 말도 더듬고 전망도 보이지 않으며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도 탈락한 영철을 거부하고, 영철은 이에 절망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병태와 영철은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예쁜 고래를 잡으러 떠나겠다던 영철은 홀로 바닷가 절벽까지 자전거를 몰고 올라가 바다로 뛰어든다. 학교는 무기한 휴강에 돌입하고, 병태는 텅 빈 교정을 서성이며 괴로워한다. 병태는 결국 입대하고, 병태를 만나지 않겠다던 영자는 역으로 병태를 마중 나온다. 입영열차 차창에 매달려 두 사람은 입맞춤을 한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신체검사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해 미팅, 연애, 당구 치기, 술 먹기 대회, 여행 등 대학생들의 일상을 따라간다. 기본적으로 이들의 일상은 어떻게 보면 낭만적이고 어떻게 보면 한심하다. 그들의 일상이 즐겁지만은 않다는 건 곧 알 수 있게 된다. 그들의 밝은 일상 가운데, 음울한 분위기의 사이키델릭(psychedelic·환각 상태)한 음악들, 의미심장한 대사, 감상적인 플래시백이 도처에 출몰하기 때문이다. 특히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영화는 급속도로 우울해지기 시작하고, 후반부에 들어서게 되면 급격한 좌절의 모드로 접어든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주인공 네 명이 더블데이트를 하고 있는 장면. 맨 왼쪽부터 영철(하재영)과 순자(김영숙), 병태(윤문섭), 영자(이영옥)의 모습이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은 1960년대의 우울을 보여 주는 반면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 영화의 지배적 정서는 조울이다. ‘명랑’은 당시 정부가 가장 강조하던 단어 중 하나였다.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이란 뜻의 이 단어는 정부가 국민의 정서를 조율하는 기제로 활용됐다. 요컨대 정부는 당시 한국사회의 그늘을 억지로 가리려 했다. 이 정서는 무엇보다 대중문화에 강요됐다. 1970년대 후반 ‘얄개’ 시리즈가 인기를 얻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바보들의 행진’은 이 강요된 밝음의 세계를 표면에, 그리고 원인이 불분명한 우울을 이면에 배치하고 있다. 원인 불명의 우울은 원인이 실제로 불분명한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의 직접적 원인은 물론 국가의 검열이었다.

◆검열이 만들어 낸 시대의 걸작

사실 이 영화의 서사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비약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상황과 맞지 않는 대사나 행동, 감정의 표출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예컨대 영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기는 매우 갑작스러운데, 이는 바로 앞 병태와 영철의 여행 시퀀스가 검열로 상당 부분 단축돼 그 감정적 발전 과정이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한 장면은 휴강을 하고 경기 응원 연습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너무나 진지하고 비장하게 토론하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응원 연습에 참여하는 것이 이토록 진지한 토론의 대상이 될 리 없다. 무언가 상황과 대사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된 상황, 즉 시위에 참여할 것을 두고 벌어지는 토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 중 주인공이 고뇌하는 장면의 배경으로 나오는 경기 응원 장면은 본래 거리 투쟁의 장면이어야 했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판본에는 이 장면이 남아 있지만, 병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 역시 검열돼 당시 상영본에서는 볼 수 없었다.

애초 이 영화는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부터 수차례에 걸쳐 전면 개작 및 부분 수정 명령을 받았던,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도의 억압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였다. 그러나 하길종은 이러한 검열이란 국가 폭력을 우회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영화를 구원해 줄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리하여 ‘바보들의 행진’은 청년의 고민을 시대의 고민으로 확대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검열의 억압에 눌려 그 흔적만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이상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아니 그럼으로 인해 이 영화는 1970년대 중반 한국사회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대표작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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