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이춘재(56) 씨가 사건이 한창이던 1980년대 말 강도예비 혐의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으나, 법원의 집행유예 판결로 풀려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씨가 석방된 지 7개월 만에 만 13세의 소녀가 무참히 살해된 9차 사건 등 2건의 사건이 더 일어났는데, 이 씨가 진범이라면 당시 법원의 집행유예 선고 탓에 추가 피해가 난 셈이 된다.
26일 연합뉴스가 확보한 판결문에 따르면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특정된 이 씨는 1989년 9월 26일 0시 55분쯤 수원시의 B 씨 집에 흉기를 들고 들어간 혐의(강도예비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로 기소됐다.
1심은 1990년 2월 7일 이 씨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이 씨의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 씨는 즉각 항소했다.
당시 이 씨는 "얼굴을 모르는 청년으로부터 폭행당한 뒤 그를 뒤쫓다가 피해자의 집에 들어간 것일 뿐, 금품을 빼앗으려고 흉기를 휴대한 채 침입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항소이유는 상식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울 법한데, 두 달 뒤 열린 2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의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은 "피고인의 항소이유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피고인은 초범이고, 이 사건의 실제 피해자가 입은 피해는 경미한 점, 피고인의 가정형편이 딱한 점 등 여러 정상에 비춰볼 때 원심의 형량은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고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이 씨는 이로써 2심 판결이 난 1990년 4월 19일을 기해 석방됐다.
이 씨가 강도예비 범죄를 저지른 건 1988년 9월 7일 화성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모(52) 씨가 블라우스로 양손 결박돼 숨진 채 발견된 7차 사건 1년 뒤이다.
7차 사건으로부터 10여일 뒤인 1988년 9월 16일 8차 사건이 발생했지만,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모방 범죄로 판명 났기 때문에 이 씨와는 관련이 없다.
이 씨가 구속된 이후 화성연쇄살인 사건은 더는 이어지지 않다가 그가 풀려난 지 7개월 뒤인 1990년 11월 15일 화성 태안읍 병점5리 야산에서 김모(13) 양이 스타킹으로 결박된 상태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9차 사건이 일어났다.
9차 사건은 화성연쇄살인 사건 중 피해자의 나이가 가장 어리고 피해자의 특정 부위가 훼손돼 범행 수법이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이듬해 4월 3일에는 화성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권모(69) 씨가 하의가 벗겨진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된 10차 사건이 발생했다.
9차 사건은 이 씨의 DNA 검출된 3건의 사건(5·7·9차) 중 1건에 해당한다.
한편 MBC '실화탐사대'가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로 특정된 이 씨의 얼굴과 지인들의 증언을 공개했다.
'실화탐사대'는 지난 25일 오후 방송을 통해 이씨의 사진을 공개했다. 또한 제작진이 이 씨의 학창 시절 동창을 만나는 모습도 방송했다. 동창은 "조용한 친구이고 혼자 있기 좋아한 친구여서 모두 놀랐다"라고 밝혔다. 또 "열등감이라고 할까, 집안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어렸을 때 분노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고도 말했다.
이춘재의 고향 한 어른은 "어렸을 적에 인사성이 밝고 착한 아이였다"며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작진은 이춘재의 어머니도 만났다. 이춘재의 모친은 "작년에 내가 음식 차려서 교도소에 갔을 때 잔디밭에서 (이춘재와 함께) 먹었고 다달이 영치금도 보내줬다"라고 했다.
이 씨의 어머니는 "우리 남편이나 우리 집안, 시동생들도 다 착했는데 얘(이 씨)가 이렇게 돼서 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다"면서도 "(처제살인사건은) 전처가 가출을 해서 홧김에 얼떨결에 저지른 죄다"라고 말했다.
아들 이춘재에 대해 "불량하고 나쁜 애 같으면 모르는데 그런 애가 아니고 군대도 잘 다녀오고 회사도 다닌 애"라며 "부모 일도 잘 도와줬다"라고 전했다. 이어 "(연쇄살인을) 했으면 왜 몰랐겠나"라며 "나는 절대 아니라고 믿고 절대 믿어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김경호 기자 stillcut@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