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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팔방 뛰어논다”, ‘고래의 낙원’ 한반도의 바다 [강구열의 문화재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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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7-20 16:00:00 수정 : 2019-07-20 23: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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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암각화(2)

지난 1일, 일본이 31년 만에 상업포경을 재개했습니다. 하루 전날인 6월 30일 국제포경위원회(IWC))를 탈퇴했다고 합니다. 잡은 고래를 항구에 내려놓는 장면이 보도되면서 고래 보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비난이 커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포경은 우리에게도 깊은 악연이 있죠. 일제강점 초기부터 시작된 일본 포경회사들의 남획으로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들의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여파로 우리 바다에서 고래를 떠올리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 됐지만 한반도의 바다에 고래가 넘쳐다던 때가 있었습니다. 

 

“많은 고래들이 보인다.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팔방에서 뛰어논다. 셀 수조차 없다.”

 

1840년대 미국 포경선의 작업 일지 중 일부입니다. 짧은 글이지만 엄청난 사냥감을 만난 사냥꾼의 흥분이 느껴집니다. 셀 수조차 없는 고래들이 뛰어노는 바다를 상상하게도 됩니다. 한반도의 바다가 이랬습니다.   

 

반구대암각화의 고래 그림

반구대암각화는 한반도의 바다와 고래의 길고, 질기며 풍성했던 인연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일 겁니다. 울산암각화박물관에 따르면 307점의 표현물 중 고래는 53점으로 가장 많아 단연 반구대암각화의 주인공입니다. 조사마다 숫자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가장 많은 건 분명합니다. 반구대암각화의 예술성 역시 고래 그림에서 빛을 발합니다. 세계 각지의 고래 암각화와 비교해도 단연 우뚝합니다. 

 

◆너무나 사실적인…선사인들이 그린 범고래

 

반구대암각화는 고래의 생태적 특성을 상세하게 표현하거나, 종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사실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적잖은 연구자들이 반구대암각화의 고래의 종류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주요한 것 몇 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한반도 바다와 깊은 인연을 가진 귀신고래부터 살펴볼까요. 귀신고래는 목 아래쪽에서 가슴지느러미에 못 미치는 부위까지 길이 1~2m의 2~5개의 주름이 있는 게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귀신고래
귀신고래

그림①을 보면 머리와 이어지는 부분에 4개의 홈을 그려 귀신고래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방긴수염고래

그림②는 고래하면 연상하게 되는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물을 공중으로 내뿜고 있습니다. 반구대암각화의 화가들도 이런 모습이 흥미로웠을 것입니다. 세 마리의 고래를 나란히 세우고 치솟는 물줄기를 V자형으로 그렸습니다. 고래들은 통통하고, 등지느러미가 없습니다. 머리 부위가 크고 허리가 두껍다는 점, 턱선이 크게 구부러져 있다는 점 등에서 북방긴수염고래로 추정됩니다. 북방긴수염고래는 움직임이 느리고, 몸에 지방이 많아 포경에 성공했을 때 물에 가라앉지 않고, 출몰이 잦아 사냥에 적합합니다. 깊은 바다에 사는 이 고래를 사냥감으로 삼았다는 건 선사시대 한반도에 전문적인 포경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겠냐는 추측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혹등고래

반구대암각화의 고래 그림 중 가장 큰 것은 길이가 80cm인 그림③입니다. 배를 드러내고 뒤집혀 있고, 그림에 운동감도 느껴지지 않아 사냥 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몸통을 길게 가로지르는 선입니다. 실제로 이런 모습의 고래는 없다고 하는데, 과장되었다고 가정하면 주름이 가장 굵고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혹등고래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가슴지느러미가 몸쪽에서 멀어져도 거의 동일한 폭을 유지하다 끝부분을 둥글게 마무리한 점도 혹등고래의 특징입니다. 

 

범고래

그림④를 보면 떠오르는 놈이 있지 않나요? 몸통에 반점 같은 걸 표시하고, 등지느러미가 직각에 가깝게 표현된 게 두드러집니다. 범고래와 흡사합니다. 

 

◆고래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단이었을까 

 

반구대의 선사인들이 큰 정성을 들여 고래를 바위에 새긴 이유는 뭘까요? 선사시대에 이만한 암각화를 그리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림의 형식, 내용을 볼 때 긴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작업을 한 게 분명합니다. 그림을 새길 바위도 신중하게 골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답은 역시 고래 그림을 정밀하게 뜯어보는 것에서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래 그림이 집중된 반구대암각화의 왼쪽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죠. 

 

고래 무리

고래가 무리를 지어 헤엄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머리를 상단으로 두어 하나의 방향성을 보입니다. 위에서 내려다 본 구도로 전체를 조망하며 짜임새가 있게 연출되었고 고래의 크기, 배치, 비례, 역할까지 계산한 듯 합니다. 이 거대한 생명체에 대한 외경심까지 느끼게 하는 이 부분은 그 시절에도 전문 화가 집단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봅시다. 

 

고래 무리의 선두에 서 있는 건 거북이 세 마리(그림⑤)입니다. 고래 무리를 선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작살이 등에 박힌 고래(그림⑥)도 있습니다. 좀 더 아래로 시선을 둬보죠. 

 

사지를 수평으로 벌리고 손과 발을 과장되게 표현한 사람(그림⑦)의 형상이 보입니다. 고래 무리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새 두 마리의 호위를 받는 듯 한 고래(그림⑧)도 눈여겨보시죠. 새 한 마리는 입에 뭔가를 물었는데, 물고기로 보입니다. 

 

소개한 그림들이 가지는 의미를 엮어보면 반구대암각화의 제작 이유에 대한 이런 유추가 가능합니다. 

 

고래 그림 속 이질적 존재인 거북이와 새는 안내자입니다. 물고기를 물고 있는 건 새의 잠수능력을 떠올리게 하는 데 가마우지가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이들이 이끌고 있는 건 고래의 영혼입니다. 사냥에 희생되어, 이승의 바다를 떠나 저승이 있는 하늘로 향하는 고래들입니다. 작살이 박힌 고래는 죽음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거북이, 가마우지를 안내자로 삼은 건 바다, 육지, 하늘을 오가는 공간 이동 능력에 착안한 것입니다. 죽음을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공간 이동으로 본다면 말입니다. 

 

사지를 잔뜩 벌렸고, 손과 발이 과장된 형상은 샤먼으로 해석됩니다. 손과 발을 유별나게 표현해 ‘수족과장형’으로 불리는 데 해외의 암각화에서도 하늘과 교신하는 존재로 묘사돼 등장합니다.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해 마치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아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육체와 혼의 분리 상태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샤먼은 고래들의 영혼을 달래고, 배웅하고 있습니다. 

 

종합하면 반구대암각화는 고래의 죽음에 대한 애도, 귀천에의 희망, 회생의 기원을 복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풍부한 식량원이었던 고래를 불가피하게 죽이지만 선사인들은 영혼을 위로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고래가 새로운 육신으로 재생해 번식하고, 그것이 다시 자신들의 풍요로 이어지기를 기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간절한 염원은 선사인들의 생존, 종족보존의 욕망이기도 했을 겁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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