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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렌즈 통해 세상과 소통… 홀로서기 연습” [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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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5-25 22:00:00 수정 : 2019-05-25 13: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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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프레임’ 7년째 운영 조세현 사진작가 / 2010년 英 윌리엄 왕자 주최 행사 / 판매금 전액 노숙인에 기부 놀라 / 서울시와 함께 사진교육 뜻 모아 / 2012년부터 총 229명 수료 ‘새 삶’ / 다시 거리로 간 제자 한명도 없어 / 봉사 통해 삶에 보람… 오히려 감사

“예전에는 첫 수업에 들어가면 (냄새가 지독해서) 내가 코를 막았어요. 꼴을 보면 정말 못 봐주겠어. 진짜 (노숙인이 있는) 거리 자체예요. 두 번째 수업이 되면, 세수는 하고 와요. 세 번째 되면 옷을 갈아입고 와요. 그다음 수업에선 양복까지 입고 오버를 떨어요.”

사진작가 조세현(61)의 만면에 웃음이 넘친다. 말로는 노숙인 제자들을 흉보는 듯한데 표정엔 애정이 가득하다. 그에겐 “대학에서 가르친 제자 10명보다 노숙인 제자 한 명이 다시 찾아오는 게 더 감동”일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조세현 작가는 노숙인 사진강의에 대해 “노숙인 229명, 소외계층 청소년 2000명을 제자로 배출시켰다”며 “사진으로 이런 영향을 주게 되니 대학은 필요 없다 싶어서 일찌감치 교수직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사진은 최근 조 작가가 강의에서 노숙인들이 찍어온 사진을 평가해 주는 모습. 희망프레임 제공

조 작가와 서울시가 열어온 노숙인·쪽방 주민 사진학교 ‘희망프레임’이 올해로 7년째를 맞았다. 2012년 시작해 지금까지 수료한 노숙인만 229명에 달한다. 그는 유명 정치인, 기업인들을 렌즈 앞에 세우기만도 바쁜 한국 최고 사진작가 중 한 명이다. 이런 그가 노숙인의 손에 술병 대신 카메라를 쥐여준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24일 서울 용산구 ‘조세현의 희망프레임’ 사무실에서 만난 조 작가는 “2010년 뭣도 모르고 영국 윌리엄 왕자가 주최한 행사에 갔는데, 사진 판매금을 기부받는 자선 전시였다”고 돌아봤다. 당시 세계 유명 작가 100명이 모였다.

“그때 60만파운드, 한국 돈으로 12억원 정도가 모였어요. 그걸 전부 일 년간 노숙인 사진 교육에 쓰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행사 후 파티에서 노숙인 사진가인 제프 허바드가 내 옆에 앉았어요. 인생의 밑바닥에서 정말 힘든 삶을 살았는데, 2, 3년 교육 과정을 밟고 작가가 됐더라고요. 야, 충격받았어요.”

서울에 돌아온 그에게 또 우연이 일어났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원순 당시 후보가 수염을 성성하게 기른 채 찾아왔다. 조 작가는 그대로 써달라며 “중 늙은 변호사가 후보 사진을 찍겠다고 왔는데 안 될 것 같더라”고 떠올렸다. 두 사람은 촬영 대신 노숙인 얘기에 푹 빠졌다.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박 시장이 그를 바로 불렀다. “우리 해보자” 의기투합했다. 당장 배고픈 노숙인들에게 장비도 비싼 사진을 가르친다니, 현장 공무원들이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밥으로 배를 채우면 그때뿐이에요. 문화예술은 평생 가요. 인성이 변하기도 해요. 왜 하필 사진이냐고 하는데, 사진은 일단 흥미 유발이 쉬워요. 이 시대 대세잖아요. 노숙인들에게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을 올리라고 독려해요. SNS를 하면 남과 소통하며 ‘보통 사람’이 되거든요. 이게 굉장한 무기예요. 사진을 올렸는데 ‘좋아요’가 달리면 너무 신나들 하더라고요.”

그의 수업법은 독특하다. 조리개니 노출이니 하는 기술은 뒷전이다. 대신 ‘세상을 보는 법, 사물을 꾸준히 관찰하는 법’을 가르친다. 2015년 만든 중급반인 ‘희망 아카데미’에는 사진과 관련 없는 사회 저명인사들을 특별 강사로 참여시킨다. 혜민 스님, 가수 이선희, 피아니스트 노영심, 소설가 은희경,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등이 기꺼이 시간을 나눈다.

“이들을 기술자로 만들면 아무 의미 없어요. 다른 노숙인과 똑같아요. 그런데 사물을 꾸준히 관찰하는 법, 인문학적인 자세를 교육하니 변하는 거예요. 그런 부분이 정말 좋아요.”

 

‘작가’ 하면 떠오르는 외곬 이미지와 달리 그에게서는 사회·사람을 향한 열린 자세가 느껴졌다. 그는 “제가 소탈한 건 타고났다”며 “(제자들과) 같이 국밥 먹고 껴안고 머리가 지저분하면 막 쥐고 흔들면서 ‘머리에 이 나오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노숙인들에게 준 정은 보람으로 되돌아왔다.

“2012년에 영등포역에서 강의하는데 붕대를 둥둥 감은 사람이 찾아왔어요. 알고 보니 ‘영등포역 왕초’더라고요. 얼마나 성질이 더럽겠어요.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살기가 떠돌고. 이 깡패 같은 사람이 사진을 배우고 나니 ‘저 나가서 조 선생님 제자라고 얘기해도 돼요’라고 묻더라고요.”

그의 제자 자랑은 줄줄이 이어졌다. ‘희망 아카데미’까지 마친 노숙인 중 일부는 그의 조수가 됐다. 서울시가 만든 ‘희망 사진관’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다. 일당 10만원, 20만원을 주는 대학생 동아리 행사에 나가기도 한다. 그는 4년간 함께 일한 노숙인 제자가 얼마 전 제주도로 귀촌하자 자신이 쓰던 렌즈를 선물했다. “너무 감동하더라”라는 그의 표정에 흐뭇함이 배어났다. 그는 “지난 스승의 날엔 (노숙인) 제자가 케이크를 사 들고 왔다”며 “‘희망 아카데미’가 이렇다고 광고 좀 해달라, 서울역에 누워서 행인들 욕하는 사람들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노숙인 제자에 대한 그의 믿음은 강했다. 자신의 노하우가 담겨 있어 절대 대여하지 않는, 하루 대여료만 수백만원에 달할 스튜디오도 이들에게는 기꺼이 수업 장소로 내준다. 그는 “한 명이 살짝 못 견디고 술에 빠졌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아직 노숙인으로 영영 돌아간 제자는 한 명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를 그들에게서 많이 느껴요.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하게 돼요. 에너지와 감동을 많이 얻죠. 이제는 이런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어요. 내 삶에서 보람을 찾게 하는 굉장히 특별한 교육이에요.”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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