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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미칼럼] 김정은체제의 티핑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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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4-23 21:03:59 수정 : 2019-04-23 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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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재 돌풍’ 위력에 北 경제난 심각 / 文, 핵 포기 설득만이 변화 이끌어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는 1992년 빌 클린턴의 승리를 이끈 역대 최고 선거 구호로 꼽힌다. 먹고사는 문제는 정치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본지가 창간 기획으로 연재한 ‘체제전환국을 가다’ 시리즈에 등장하는 나라들도 대개 경제적 어려움이 체제 전환의 압력으로 작동했다. 헝가리, 폴란드와 같은 동구권 국가나 베트남, 쿠바 정부가 국민들의 현재, 미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체제 전환의 혼란을 감수하지 않았을 테다. 성공한 체제 전환 모델 중 하나인 폴란드의 경제 개혁을 이끈 레셰크 발체로비치 전 부총리는 본지 인터뷰에서 “(개혁 결과가)위험하더라도 희망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자주’를 20여 차례, ‘자력’ ‘자립’을 각 10여 회 언급했다. 올해 신년사에서 자주, 자력을 각각 서너 번 쓴 데 비하면 연설 분량을 감안해도 빈도수가 부쩍 높아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회담 결렬 후 김정은식 응전이다. “적대 세력들의 제재 돌풍은 자립, 자력의 돌풍으로 쓸어버려야 한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21일 현 정세를 ‘천리마 운동’을 시작한 1956년에 비유했다. 북한 전역에서 ‘자력갱생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자력갱생을 ‘심장에 쪼아 박도록’(노동신문 사설) 선동할 정도로 ‘제재 돌풍’ 위력이 크다는 방증이다.

황정미 편집인

김정은이 하노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한 건 그만큼 북한 경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석탄 등 수출 길이 막히면서 2016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해외 돈벌이 수단인 노동자들도 송환될 처지다. 외환 곳간은 쪼그라드는데 작황 부진까지 겹쳐 이번 여름부터 김정은체제는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타격을 가장 크게 입은 쪽은 정부 급여에 의존하는 당 관료, 군인, 경찰들이라고 한다. 김정은의 통치자금이 말라붙으면서 3대 세습체제를 떠받쳐온 중간 관료들 장악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8년 만에 열리는 북·러 정상회담은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보내는 김정은의 SOS(긴급구호신호)다.

트럼프 대통령이 “급할 것 없다”고 여유를 부릴 만하다. 통계 수치 하나 내놓지 않는 북한 사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으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북 제재 완화 가능성을 일축한다. “우리는 그 지도자들이 그들의 파괴적인 행동을 바꾸고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때까지 정권에 대한 최대 압박을 지속적으로 가할 것이다.” 이란 원유 수출 ‘제로(0)’ 방침을 밝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메시지는 테헤란을 넘어 평양까지 겨냥하고 있다.

‘천리마 운동’ 같은 할아버지 시절 구호를 내세운 김정은도 60년 전 수법이 통할 거로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북한 경제 체질이 달라졌다. 무역 의존도가 절반에 달하고 주민들이 생계를 의존하는 장마당이 400개가 넘는다. 그보다는 아버지식 수법이 현실적이라고 여길 법하다.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김정일이 ‘햇볕정책’ 기간을 기울어가는 정권의 자력갱생 기회로 십분 활용했다”고 썼다.(‘장성택의 길’) 평창 동계올림픽을 지렛대로 국면 전환에 성공한 김정은은 올 신년사에서 ‘조건 없는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 카드를 내밀었다.

문재인정부는 그 카드를 덥석 받았지만 이미 트럼프에게 퇴짜를 맞았다. 대북 유화론자인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아무리 남북경협 치어리더로 나선다 해도 워싱턴 장벽을 우회할 수는 없다. 북한 경제 전문인 서울대 김병연 교수는 이르면 올 하반기 북한 외환보유액이 바닥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지금 온도가 90도인지, 95도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끊어오르기 시작하는 ‘티핑 포인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완전한 핵 포기만이 비등점을 낮출 수 있다고 김정은을 설득하는 게 문 대통령 할 일이다. 과거처럼 ‘우리끼리’를 내세워 찬물을 끼얹었다간 북핵 해결 기회는 물론 동맹국과 국제 사회 신뢰를 송두리째 잃게 된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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