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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소재로 친일과오 ‘의도적 망각’… 시대의 복잡성 반영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04-09 06:00:00 수정 : 2019-04-09 08: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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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최인규 감독의 ‘자유 만세’ /허구적 무력 항일 지하조직 이야기로 /승전국 지위 향한 민족 집단 소망 충족 /친일 영화 수차례 만든 최인규 감독 /해방 후 항일로 빠르게 ‘궤도 수정’ /극심한 혼란 속 출발한 현대 영화사 /불의·선행 뒤섞인 시대 아이러니 담아
2019년 기해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그리고 한국영화 100년의 해다. 세계일보는 일제강점기 조선영화 10편에 이어 광복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즉 광복-전쟁-혁명-군사정권 출발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제작된 한국영화 12편을 꼽아 영화사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 등을 재조명한다.

 

1946년 한 일간지에 게재된 영화 ‘자유만세’ 개봉 및 만원사례 광고.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광복 후 한국영화사의 출발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됐지만 영화업계의 어려움은 전쟁 때와 다르지 않았다. 남한 영화계는 영화를 제작할 기자재와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거니와 정식 정부도, 교역을 위한 환율도 없는 상태에서 해외에서 필름을 수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1945년 9월부터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 당국은 한국영화산업보다는 한국민의 미국식 민주주의 함양에 훨씬 관심이 많았고, 극영화보다 계몽영화나 교육영화 제작에 관수용 필름과 기자재를 편중 지원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1946년부터 극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첫 영화는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이었는데,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1946년 10월22일 두 번째 영화가 등장했다. 바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다. 이 영화는 “조선영화의 수준을 올린 작품”이란 평가를 받으며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을 거뒀고, 광복 후 한국영화사의 출발을 상징하는 작품이 됐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중(전창근)은 조선 내 항일 지하조직의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1945년 8월이 되자 동료 조직원들을 설득해 혁명적 소요를 일으키고자 하나 동료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에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소수의 조직원으로 소요를 일으키려 한다.

일본군 간부(독은기)의 연인으로 처지를 회의하던 미향(유계선)은 일본군으로부터 피신해 자신의 집에 숨어든 한중을 보살피다 그를 존경하고 연모하게 된다. 미향은 한중의 지하조직에 합류하기 위해 은신처를 찾지만, 그녀를 미행한 일본군들이 은신처를 급습해 미향은 죽고, 한중은 부상한 채 병원에 압송된다. 평상시 그를 흠모하던 간호사 혜자(황려희)는 한중 동료(김승호)의 설득에 용기를 얻고, 일본 헌병을 따돌리고 한중을 탈출시킨다.

원래 영화는 70분 내외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영상은 52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축소돼 그 전모나 완성도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특히 결말부가 사라져 아쉬운데, 당시 기사에 따르면 한중이 탈출 이후 일본 헌병의 총에 죽고, 그날 조선은 독립을 맞이한다는 줄거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선 역사적 허구를 바로잡자. 1945년 조선에 무력 항일 조직은 없었다. 수십년간의 피식민, 10여년간 군국주의와 철저한 탄압을 거친 뒤 조선, 더군다나 경성에 무장 항일 조직은 남아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번듯한 건물의 지하에 각종 무기와 통신시설을 갖춘 지하조직이란 것은 그야말로 영화적 상상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허구는 단순히 고증을 등한시했다는 정도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 허구는 전범국도 패전국도 아닌 조선이 남북으로 분할 점령돼 억울하게 패전국 아닌 패전국의 처우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 참여해 승전국으로서의 지위를 얻었어야겠다는 민족의 집단적 소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불과 1년 전 과거를 새롭게 써 버린다. 당대 대중은 이 새롭게 상상된 역사에 만족했을 것이다.

영화 ‘자유만세’에서 항일 지하조직원과 주인공 한중이 모여 있는 아지트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문제적 감독 최인규

이 영화의 최고 반전은 최인규 감독이다. 1911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최인규 감독은 형 최완규와 함께 고려영화사를 설립해 신의주에서 극장을 경영하며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국경’(1939)이고 ‘수업료’(1940)와 ‘집 없는 천사’(1941)를 연출했다.

그 뒤 내선일체 논리를 바탕으로 한 ‘태양의 아이들’(1944)과 일본 ‘성전’ 참여를 독려하는 ‘사랑과 맹서’(1945)를 연출했다. 이 두 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업료’도 내선일체 이데올로기를 배면에 깔고 있다.

‘집 없는 천사’는 2000년대 중반 필름이 발굴되면서 마지막 시퀀스에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 장면이 포함된 사실이 발견됐다.

그런 최인규가 해방이 되자 재빨리 태도를 바꿔 ‘자유만세’ 외에도 1948년 ‘죄 없는 죄인’과 ‘독립전야’ 등 광복영화 3부작을 연출한 것이다. 최인규의 단짝인 ‘자유만세’ 촬영감독 한형모는 1944년과 1945년 두 편의 친일 영화에도 촬영감독으로 참여했다.

최인규와 한형모는 해방 후 한국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최인규 감독은 6·25전쟁 과정에서 실종됐는데, 그가 해방 후 6·25전쟁 전까지 자신의 산하에 거느렸던 감독이 정창화와 신상옥, 홍성기 등이다.

정창화 감독은 임권택과 정진우 감독의 스승이며, 임권택 감독은 다시 수많은 후배들을 길러냈다. 신상옥 감독의 계보 역시 임원식과 장일호, 이장호로, 다시 배창호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최인규는 한국 현대영화사의 출발점이자 꼭짓점의 위치를 점한다. 한형모 감독은 1956년 한국영화의 당대 흥행작이자 새로운 현대 한국영화의 흐름을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자유부인’을 연출했고, 그 뒤에도 ‘여사장’(1959), ‘돼지꿈’(1961) 등 한국영화사의 걸출한 작품을 만들었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한형모는 1950년대 이후 현대 한국영화의 발명가 중 한 명이다.

영화 ‘자유만세’의 주인공 한중(전창근)과 미향(유계선)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망각의 역사와 기억의 역사

말하자면 광복을 기치로 내 건 한국영화사의 출발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미 친일의 역사에 침윤돼 있었다. 이 기묘한 불일치, 혼란, 착란은 한국 현대사가 갖고 있는 복잡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친일에서 항일로의 이 편리한 태세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여기서 역사의 단죄를 논하거나 해방 후 한국영화사의 출발을 폄하하고 조롱하려는 의도는 없다.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피식민과 해방, 격렬한 좌우 대립, 전쟁, 혁명, 쿠데타, 급격한 경제성장, 두 번째 쿠데타,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외환위기, 최근의 촛불혁명…. 그야말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는 단순히 국가를 뒤흔든 사건들이 지난 100여년간 이어졌다는 것, 사회·정치·경제적 변화가 심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격동은 우리 내부의 가치와 정서, 사고 체계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가치와 내면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약함과 용기,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폭력과 선행이 뒤섞인 잡탕, 혼란의 기록들이 우리 역사의 원천을 이룬다. 그리고 이 혼란의 흔적들에서 무엇을 가리고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역사의 서사가 만들어진다.

어느 학자는 민족이 상상(력)의 산물이라 했다. 또 다른 학자는 민족은 망각 위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어떤 역사는 부끄럽고 비겁한 행적, 폭력과 학살의 경험을 끊임없이 지우고 덮어쓰고자 한다. 그리하여 무결하고 위대한 역사를 가공하고자 한다. 반면 이 지워진 흔적, 억압된 기억을 굳이 발굴해 우리 눈앞에 드러내는 역사도 있다. 이러한 공식역사와 대항역사(기억) 사이의 긴장 과정을 통해 과거에 대한 시각, 역사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혼란스럽지만 종합적인 역사가 만들어진다.

한국영화사 역시 이러한 가림과 폭로가 반복돼온 기록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해방 후 현대 한국영화사의 출발점인 ‘자유만세’는 상상 혹은 망각의 시도다. 그리하여 존재 그 자체로 한국영화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 심지어 역사 자체의 어떤 본질을 슬쩍 드러낸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오늘날 역사가들에게 이 영화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망각하고자 시도했던 친일의 역사를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 나아가 해방 후 우리 한국영화사의 출발이 위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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