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환란 사태를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김석동(66) 전 금융위원장은 당시 실무과장으로 달러 관리의 최일선에 있었다. 외환 관리를 책임지는 실무과장으로서 온몸으로 환란을 막으려 했고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반대했다. 그때 실상이 1999년 1월 열린 ‘환란책임 국회국정조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 장재식 국정조사위원장이 모범공무원으로 김석동 과장을 유일하게 거명했던 게 국회 속기록에 그대로 나와 있다.

김 전 위원장은 솔깃했다. 그러나 그때 부인의 말을 떠올렸다고 술회했다.
“집사람이 그랬던 걸 기억한다. ‘당신은 언젠가부터 불평불만이 없어졌다. (삼성물산에 있던 시절) 집에만 들어오면 불평하곤 했는데, (지금은) 봉급은 쥐꼬리만 해도 불평이 없어졌다.’ 그런 아내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면서 김 전 위원장은 자신의 인생 잣대는 공익이었다고 말했다. “적어도 프라이빗 잣대가 아닌 퍼블릭 잣대였으니 공무원 시절 봉급은 적어도 사명감으로 일할 수 있었고, 나의 크나큰 자부심이었으며 인생의 자산이 되었다.”

“환란 당시 상위 30개 대기업 가운데 8개가 부도가 났다. 일본은 이미 한국 경제의 이상기류를 감지하고 (1997년) 3월부터 돈(투자금)을 빼내기 시작했다. 이른바 헤지펀드들은 한국을 공격하기 위해 날뛰는 시절이었으니 참으로 급박하면서도 한심했던 나날이었지….”
김 전 위원장은 국내 재정금융에서 위기가 감지되거나 닥칠 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섰던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큰일 날 때마다 불려갔다. 다들 가고 싶어하는 청와대 근무나 그 좋다는 해외근무 한 번을 못 해봤다. 해외발령이 났다가도 취소되고 ‘무슨 대책반장’으로 기용되곤 했다. 종래 관료들이 하던 방식으로는 해결이 안 되거나 부작용이 클 경우엔 꼭 기용되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때 가장 최적의 해결방식을 내놓아야 했다. 가족에겐 늘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은퇴하고서야 제대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특히 한국고대사에 관심이 깊었다. 6·25전쟁 수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60년부터 지금까지 달려온 한국인의 저력이 무엇인지 천착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주국가를 건설한 한국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런 언급은 ‘우리가 잘났다’는 말이 아니라 그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에 이은 6·25전쟁으로 그야말로 폐허 위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이뤄냈다. 세계 11번째 규모가 된 나라는 16세기 중상주의 시대 이후 한국밖에 없다.”

“우선 잘나가는 나라들 가운데, 한국인의 지능이 가장 높고 자녀공부를 열심히 시킨다. 일하는 시간도 OECD 연평균 1700시간대인데, 한국은 2200시간이었다. 1990년대에는 연간 3000시간대였으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 예컨대 지난해 연구개발 투자는 규모면에서 세계 6위이지만 백분율로 따지면 세계 1위였다.”
김 전 위원장은 “기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열쇠가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첫째 열쇠는 해외 승부 전략이요, 두 번째 최종 열쇠는 한민족의 DNA다. 한민족의 DNA는 네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DNA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첫째,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끈질긴 생존 본능이다. 유명 언론인 마이클 브린의 말이 생각난다. ‘만약 당신이 폭풍으로 한국인과 함께 에베레스트에 갇힌다면 한국인처럼 믿음직스럽고 용감한 사람이 없다. 한국인의 끈질긴 생존 본능은 역사에서 증명된다.’ 둘째, 승부사 기질이다. 한국인은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가장 빨리 채용한 나라에 속한다. 셋째, 강한 집단의지다. ‘우리’라는 말은 독특하다. 집단의식에서 유래된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리더십이 바로 설 때 집단의지가 형성된다는 말이다. 넷째, 개척자 근성이 강하다. 속된 말로 한국인처럼 해외에 나가 설치는 사람은 없다. 세계이민기구의 조사에서 인구 대비 1년 이상 해외에 나가 사는 사람 수의 비율은 한국인이 1위다.”
![]() |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지난 14일 서울 충정로 법무법인 지평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 도중 동아시아 지도를 보며 한국고대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경제 기적이 한국인의 DNA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
김 전 위원장은 해외 현지 조사 결과, 한국인의 DNA는 2500여년간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활약하던 기마민족과 똑같다고 강조한다.
“시베리아 남부지역 동서 8000㎞의 평평한 땅에서 초원제국을 이뤘던 기마민족이 그들이다. 평평한 땅이었다. 중국은 그들을 왜곡하고 폄하했고 서양인은 몰랐다. 스키타이족을 시작으로 흉노, 선비, 돌궐, 몽골, 여진 등 5개 북방민족은 2500년의 역사를 개척하고 이어갔다. 짧게는 700년 내외, 길게는 1400년에 걸쳐 국가를 이어나간 민족들이었다. 한국인은 이들 북방민족과 한 뿌리였다는 사실을 연구활동에서 확인했다.”
서울 충정로 김 전 위원장의 집무실은 북방민족에서 활약한 모든 종족의 활동로와 유적을 표시한 대형 지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사실 단재 신채호는 흉노, 선비, 몽골, 여진은 우리와 동족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실제 무덤, 유적, 유물, 언어, 생활, 관습의 증거들을 볼 때 한민족과 긴밀한 관계”라고 했다.
“중국 사서를 보면 흉노를 고조선으로, 선비는 고조선의 일부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돌궐은 고구려와 동맹국이었으며, 1000여년 전부터 서진하면서 셀주크와 오스만터키를 만들었는데, 오늘의 터키가 그 후손들이다. 특히 셀주크와 오스만터키의 지휘부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중요한 연구결과가 있다.”

“몽골은 원래 12세기 일어난 종족이다. 1162년생인 칭기즈칸은 발해 건국자 대조영 동생 대야발의 19세손이다. 대조영 가계를 연구한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미국 변호사)가 밝혀낸 역사적 사실이다. 분명히 여진은 발해의 후손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발해 땅을 여진이라고 칭했고, 금을 세운 아골타는 ‘한보’라는 고려(고구려)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발해만 일대를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다.”
김 전 위원장은 한국인이 남하한 내력에 대해서도 밝혀냈다고 말했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몽골고원, 바이칼고원 남부, 만주와 발해만을 차례로 거치면서 한반도로 왔다. 한국인 DNA를 보면 30%가 남방계, 70%가 북방계로 나온다.”
김 전 위원장은 경제전문가답게 현 세계경제의 맥을 짚고 있다.
“지금 경제가 나쁜 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외환경이 너무 나쁘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는 끝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다. ‘On going crisis’ 2008년 위기 원인은 그간 쌓인 부채였다. 1970년대부터 엄청난 빚을 늘려 빚으로 성장했다. 그 후유증이 2008년 사태로 이어졌다. 미국 경제도 곧 꺾일 것이다. 일본도 하향국면이다.”
김 전 위원장은 그럼에도 한국의 미래를 밝게 보고 있다.
“교범 없이 살아남는 기술을 갖고 있는 게 한국인이다. 남북이 합쳐지면 시너지 효과가 대단할 것이다. 앞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할은 커질 것이다. 아시아의 물류, 생산기지 복판에 있다. 표준궤와 광궤를 연결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있다. 언제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유럽과 물류가 가능하다. 특히 북극항로가 열려 부산이나 두만강 하구에서 로테르담까지 바로 간다면 한국 중국 일본의 수출 물자가 몰리면서 물류의 혁명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김 전 위원장은 특히 두만강 하구 접경지에 주목했다.
“중국은 두만강 접경에서 16㎞의 육로에 막혀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두만강 하구 중국 땅 훈춘, 방천에는 ‘망해각’이라는 4층 건물이 있다. 중국이 태평양을 바라보며 지은 건물이다. 두만강 하구는 중국에서는 태평양 가는 통로이며, 러시아는 경제 활성화를 만드는 근거지가 되고, 북한은 생명선이 된다. 누가 개발할까. 한국밖에 없다는 의미다. 미국 일본 또한 참여할 수밖에 없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김석동 누구인가…
●1953년 부산생, 행시 합격(23회) ●1990년 재경원 5·8 부동산 특별대책반장 ●1995년 재경원 금융부동산실명제실시단 총괄반장 ●1997년 재경원 외화자금과 과장 ●2006년 금융감독위 부위원장 ●2007년 재경부 1차관 2011년 금융위원장 ●2015년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1953년 부산생, 행시 합격(23회) ●1990년 재경원 5·8 부동산 특별대책반장 ●1995년 재경원 금융부동산실명제실시단 총괄반장 ●1997년 재경원 외화자금과 과장 ●2006년 금융감독위 부위원장 ●2007년 재경부 1차관 2011년 금융위원장 ●2015년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