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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명문가' 출신 헌재소장의 특별한 최전방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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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2-09 15:24:27 수정 : 2018-12-09 20: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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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석 소장, 3代 5명이 육군에 177개월 복무한 '병역명문가' 출신 / 6·25 전쟁 때 최대 격전지였던 가칠봉 관측소 올라 대비태세 점검 “혹한의 날씨 속에서도 최전방에서 국방 의무를 다하는 장병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올 겨울 들어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진 지난 7일 오전 강원도 양구군의 육군 백두산부대. 유남석(61) 헌법재판소장이 동부전선 최전방인 이곳을 방문해 군인들을 격려했다. 국가 의전서열 4위 헌법기관장인 헌재소장은 매년 연말을 앞두고 군부대를 찾아 장병들을 위문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날 유 헌재소장의 최전방 시찰은 그가 대한민국 병무청이 인증한 ‘병역명문가’ 출신이란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는 평이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왼쪽)이 7일 6·25 전쟁 때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이었던 강원도 양구군 가칠봉 관측소를 찾아 이곳을 지키는 백두산부대 장병을 격려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3代 5명의 남자가 육군에서 177개월 복무

9일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백두산부대를 방문한 유 헌재소장은 먼저 이 부대가 지키는 가칠봉 관측소에서 부대장으로부터 군사대비 태세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이어 직접 철책을 따라 걸으며 근무 중인 장병들을 격려했다.

장병들과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선 “혹한의 날씨 속에서도 조국 수호를 위해 최전방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장병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백두산부대 장병으로서 자랑과 보람, 긍지를 갖고 근무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유 헌재소장과 헌재 관계자들은 미리 준비해간 위문품과 격려금도 백두산부대 측에 전달했다. 대부분 20대 초중반인 젊은 장병들은 유 헌재소장과 ‘셀카’를 함께 찍으며 잠시나마 활기찬 시간을 보냈다.

유 헌재소장 가문은 지난 2013년 경기·인천지방병무청에 의해 ‘병역명문가’로 뽑힌 유서깊은 집안이다. 병역명문가란 3대(할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형제, 본인과 형제, 사촌형제도 포함)가 모두 군에 입대해 현역으로 복무를 마친 경우에 선정된다. 유 헌재소장은 먼저 부친 유재열(2009년 작고)씨가 1955년 8월20일 육군장교로 입대해 62개월간 복무하고 1960년 10월20일 대위로 전역했다. 유재열씨의 장남인 유 헌재소장 본인은 사법시험 합격 및 사법연수원 수료 이후인 1983년 12월10일 육군법무관으로 입영해 33개월간 복무하고 1986년 8월31일 중위로 전역했다.

유 헌재소장의 동생인 유대석(60)씨와 또다른 동생 유우석(56)씨도 나란히 육군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유대석씨의 아들이자 유 헌재소장의 조카인 유용선(30)씨 역시 지난 2011년 육군병장으로 전역했다. 유 헌재소장 가문 3대의 남성 5명이 육군에 복무한 기간을 전부 더하면 177개월(14년9개월)에 이른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가운데)이 7일 강원도 양구군 백두산부대 장병들과 기념촬영을 마친 뒤 일부 장병의 셀카 촬영 요청에 응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제공
◆가칠봉, 6·25 때 최대 격전지로 의미 각별

이번에 유 헌재소장이 방문한 가칠봉 관측소도 한국 안보에서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6·25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1951년 9월4일부터 10월14일까지 약 40일간 이어진 이 전투는 우리는 국군 제5사단이, 적군은 북한의 제2사단과 27사단, 13사단 7연대가 각각 참여한 것으로 전사에 기록돼 있다.

가칠봉 전투는 동부전선의 미군 제10군단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펀치볼 지역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하는 과정에서 휘하의 국군 5사단을 1951년 9월 고지 쟁탈전에 전격 투입하며 시작했다. 가칠봉 전방 500m에는 1122고지(일명 ‘김일성고지’)가 있는데 국군은 포병 및 항공 화력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오직 보병들의 근접 전투에만 의존해야 했다.

주간 공격을 개시한 5사단이 백병전 끝에 어렵게 고지를 점령하면 다시 북한군이 밤을 틈타 역습을 하는 등 고지 주인이 무려 6번 바뀌는 ‘혈전’을 치뤘다. 5사단은 끝까지 가칠봉 일대를 고수함으로써 펀치볼 지역 확보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북한군은 1100여명이 전사하고 250여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국군도 692명이 전사, 4251명이 부상하고 실종자가 437명 발생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오늘날 강원도 양구군의 명물로 통하는 ‘펀치볼’이란 지명도 가칠봉과 관련이 있다. 가칠봉 전투를 비롯해 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취재하던 외국인 종군기자가 가칠봉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이 화채 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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