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형사사법 시스템에 피해자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절차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이뤄지는 ‘형사 합의’가 대표적이다.
법원은 피고인의 형량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양형 기준’에 ‘처벌 불원’을 양형 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기 위해 일단 자신의 혐의와 책임을 회피하고 잡아뗀다”며 “그러다 보니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기회를 잃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피해자의 상처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서울지역의 한 형사합의부 재판장은 “일부 피해자나 유족은 피고인의 범죄 혐의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경제적인 문제 등 현실적인 범죄 피해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합의에 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경우 피고인이 범행 사실을 부인하더라도 피해자 측 합의서가 제출되면 ‘처벌 불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털어놓았다. 특히 피해자가 아동, 장애인 등 약자이거나 친족 간의 범행인 경우 법원에 제출된 합의서가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를 담고 있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피해자가 형사사법 시스템에서 배제되고 피해자의 ‘합의서’ 제출 여부가 형량 결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면서 형사사법 제도가 왜곡되는 현상이 빚어진다. 초기 범행 사실을 인정한 가해자가 돌연 범행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가해자 가족이 나서 반복적으로 피해자 집을 방문하거나 협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형사사법 시스템이 피해자 회복에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다.
일부 피고인은 “지금은 형편이 안 되지만 나중에 변상하겠다”면서 이른바 ‘외상 합의’를 하고 감형받은 뒤 돌변하는 사례도 있다.
피해자 측에 대한 합의나 사과 없이 ‘피고인이 반성한다’는 재판부 판단에 따라 감형되는 경우도 있다. ‘양산 아파트 밧줄 사건’ 가해자 서모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자 항소심 재판부에 수차례 반성문을 내 선처를 호소했다. 검찰은 “서씨가 처벌을 줄이고자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진심으로 반성하거나 피해자 가족에게 사과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유족도 “1심대로 무기징역을 선고해 달라”고 수차례 재판부에 탄원서를 냈다. 하지만 서씨는 지난 4월 항소심에서 반성하고 있다는 등 이유로 징역 35년으로 감형되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장혜진·배민영 기자 jangh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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