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나의 삶 나의 길] "주민은 하늘" 목민관 정신… 지자체장 6선 '금자탑' 쌓다

관련이슈 나의 삶 나의 길

입력 : 2018-06-23 15:09:05 수정 : 2018-06-23 15:09:0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55년여 공직생활 마무리 하는 김관용 경북도지사

김관용 경북도지사(76)는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해 야간대학 진학, 주경야독으로 고시 합격, 행정관료로 있다가 선거판에 뛰어들어 ‘6전6승’ 기록을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2014년 제6회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단체장 당선자 명단에 오른 인사는 그가 유일하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최근 경북 안동 경북도청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3년간 구미시장과 경북도지사를 하며 주민들과 어울려 웃고 울었던 지난날이 너무 행복했다”며 “퇴임 후 도민들이 자신들의 전화를 언제든지 받아 주는 도지사로 기억하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밝혔다. 김 지사가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경북도 제공
그가 쌓아 올린 금자탑은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끈질긴 집념, 성실성, 진정성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최근 경북 안동에 있는 경북도청에서 김 지사를 만나 55년여간 공직생활을 하며 겪은 애환과 오는 29일 퇴임을 앞둔 소회 등을 들어봤다.

김 지사가 이룩한 자치단체장 6선(구미시장 3선, 경북도지사 3선) 연속 당선 기록을 깨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질문에 그는 “지방자치 출범과 함께 기초단체장부터 당선돼 일에 파묻혀 살다보니 23년이 훌쩍 지나갔다”며 “우선 4반세기 세월이 필요하다. 다음에 기록이 나올 수 있겠지만 굉장히 힘들지 않겠느냐”고 전망하며 나름의 ‘비법’을 공개했다. 그는 “처음 구미시장에 당선된 후 2년간 시정을 이끌며 크게 깨달은 점이 있다. ‘주민, 유권자가 하늘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고, 인생을 다시 살았다”며 “그때부터 고개를 숙였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학생이 열심히 공부해 시험을 치르고 성적표를 받듯이 ‘빽’도 없고 스펙도 부족한 내가 일로써 인정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또 “책을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을 배웠는데 민선시장을 하며 그것을 피부로 느꼈다”며 “시장 바닥, 목욕탕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민을 만나 그들의 불만과 억울함을 듣고 때론 소주잔을 나누며 인생을 논하고 말동무가 됐다. 동네 친구처럼 그냥 편하게 지냈다”고 경험담을 털어놨다.

김 지사가 스스로 정립한 ‘주민(유권자) 동의론’을 들어보면 자치단체장으로서의 그의 철학과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지구상에 상대방(유권자)의 동의 없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자동차를 운전할 때 핸들을 조정하고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밟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 주민동의론 논리다. 주민의 동의와 이해를 얻어 시정과 도정을 추진했다는 의미다.

그의 말은 계속됐다. 김 지사는 “고시 출신이라는 엘리트 의식이 전혀 없었다. 모 국회의원은 ‘고시를 합격한 사람이 맞느냐’고 말할 정도였다”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렵게 성장한 내 분수를 늘 잊지 않으려고 했고 출마하면 당선되는 운(運)도 뒤따랐다”고 회상했다. 이어 “운은 덕(德)이 있어야 가능하고, 덕은 겸손에서 나온다”며 “겸손은 상대에게 져 주는 것이다. 이런 기조에서 살았고 거기서 답을 구했다”고 역설했다. 또 “나도 부족한 점이 많다. 잘못했으면 언제든지 잘못했다고 말하며 (주민들에게)용서를 구하는 보통사람”이라며 “도지사와 도민의 눈높이는 같아야 하며, 벽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측근이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지 않고 행사 분위기에 맞춘 즉석연설에 익숙하다. ‘행정의 달인’ ‘선거의 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지사는 “어떤 이는 나를 정치인이라고 말하는데 정치인일 수도 있다”며 “그러나 정치기술자는 아니다. 정치기술에 능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선거에서 선출된 ‘목민관’이지 직업 정치인 출신이 아니다는 뜻이다.

김 지사는 “우리 관료사회가 격식과 고정관념의 틀에 너무 젖어 있다”며 “호두 껍데기처럼 단단한 격식과 관념을 망치로 깨부수지 않으면 창의가 나오지 않는다. 격식을 파괴하지 않는 한 혁신은 어려운 것”이라며 공직사회에 변화의 필요성을 주문하기도 했다.

구미시장 때 겪은 에피소드다. 구미공단 근로자들이 대화하는 도중에 ‘우리 노동자들이 골프를 칠 때까지 (시장이) 안 칠 수 있겠느냐’고 말해 그때부터 20년간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근로자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시민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더라”며 “구미시장 재선 때는 무투표로 당선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도지사를 하며 보람된 일로 ‘도청 이전’을 꼽았다.

김 지사는 “전남, 경남, 충남이 오래전 도청을 이전했고, 경북이 마지막으로 남았는데 그동안 계속 미루어왔다”며 “주변에서는 (2006년 경북도지사 선거에서) 도청 이전을 공약하면 무조건 떨어진다며 만류했으나 사심 없이 추진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도청 이전 부지를 선정할 때 심사과정을 철저히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진행했고, 경북에 연고가 없는 60여명 대학교수들이 채점했다”며 “도의회 의원 60명 중 1명도 반대 없이 찬성했다”고 말했다. 또 “도청 신청사는 (주민의)접근성이 떨어지고 도시 인프라도 갖추지 않고, 도로 등을 건설해야하는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안 좋았는데 심사위원들이 최고 점수를 준 이유는 명당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그는 “도청 신청사를 구경하려는 도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관리과’를 신설했다”며 “이제는 관광명소로 유명해졌다”고 자랑했다. 이어 “도청 이전은 단순히 청사를 옮기는 차원을 넘어 경북의 정체성 재확립 의미를 갖고 있다”며 ”대구, 구미, 포항과 더불어 신도청을 중심으로 한 북부권이 추가된 힘찬 사륜구동이 완성됐다. 세종시와 함께 허리경제권을 형성해 한반도 균형발전의 새로운 성장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면서 경북도민의 ‘정체성’과 ‘얼’을 설명했다. 그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화랑정신,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호국충절, 독립운동의 고장으로 국난극복의 보루로서 의리와 뚝심, 정의감을 중시하는 굳건한 기상과 조국근대화와 역사 발전에 항상 앞장서 왔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바로 경북도민의 정체성이며 정신”이라고 설파했다. 이어 “경북도민의 얼 속에는 우리의 삶이 녹아있고 역사가 숨 쉬며 민족의 근원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며 “경북은 한국정신의 창”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경북도 신청사에 도민의 정체성과 혼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코리아 실크로드’도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프로젝트다.

김 지사는 “신라인들은 이미 1000년 전에 진취적 기상과 개방성을 앞세워 서라벌과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동로마, 이스탄불 등지를 왕래했다”며 “한국은 신라시대부터 문화발신국으로 문화수출국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됐다”고 피력했다. 이어 “육·해상 실크로드와 철의 실크로드를 통해 한국의 오랜 전통인 민족적 자존심과 문화융성 정신을 중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등지를 탐방하며 전파했다”고 말했다.

경북농민사관학교도 그의 역점 사업 중 하나다.

그는 “농촌이 점점 피폐해지고 고령화되고 있다. 농민들을 재교육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2007년 경북농민사관학교 문을 열었다”며 “부자, 모녀가 1년간 같이 공부를 하고, 이들이 수료식에서 사각모자를 쓸 때는 정말 가슴 뿌듯했다. 수료생이 2만명”이라고 흐뭇해했다.

김 지사의 별명은 ‘미스터 새마을’이다. 그는 “새마을세계화재단을 설립해 해외 보급을 체계화하는 등 새마을운동 국제화를 위해 노력을 했다”며 “봉사단원과 함께 아시아·아프리카 15개국 48개 오지를 찾아다니며 새마을운동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 제고에도 앞장섰다”고 자평했다. 새마을운동은 정치적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는 “지방분권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직을 떠나 아쉽다”고 토로했다. 23년간 지방자치를 실시했으면 시스템도 거기에 맞춰 정비하는 것이 옳다는 게 김 지사의 지론이다. 그는 “20년 이상 옷을 입었으면 이제는 갈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동안 자치분권을 강력히 주창했으나 정치논리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우리가 중앙정부로부터 은혜를 입어 시혜를 베풀어 달라는 차원에서 지방분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지방이 갖고 있는 천부의 권한을 되찾아 오겠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지방 자치조직권, 자치재정권은 제도적으로 만들어야한다”며 “지방분권은 재임 중 못다 한 일로 나에겐 숙제로 남았다. 퇴임 후 계속 추진 할 것”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퇴임 후 구상도 밝혔다. 그는 “내게 임무가 부여될 날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선출직을 할 군번은 아니다”며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에너지화해 원로로서 희생과 봉사할 기회가 있으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내 몫이며 역할”이라고 말했다.

도청을 방문하는 대부분 인사는 그에게 말을 놓는다. 김 지사보다 일곱 살 아래인 사람도 ‘도백 잘 있는가’라고 편하게 대한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뜻이다.

같은 교사 출신인 김 지사 부인 김춘희씨는 많게는 1년에 450여 곳의 상가(喪家)를 방문하고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내조자다. 김 지사는 “아내는 자신이 죽으면 문상 때마다 입은 검정색 니트를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다. 눈물겨운 얘기인데…”라고 말한 뒤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지사는 2014년 KBC 광주방송과 KBC 문화재단이 수여하는 ‘KBC 목민자치대상’ 광역단체장상을 받았다. 부인 김씨는 김 지사를 대신해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목민자치대상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로 이동하며 “일 중독에 빠진 남편을 그때서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김 지사는 목민자치대상 상금 1억원을 영호남 상생발전을 위한 종잣돈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공익법인에 기탁했다. 

김 지사는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아 늘 미안하다. 아들 둘 모두 한 번도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며 “집에서는 인기가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안동=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

김관용 경북지사는

△경북 구미(1942) △대구사범학교, 영남대 경제학과·행정대학원 졸업 △구미초교 교사 △행정고시 합격(10회) △구미·용산 세무서장 △대통령 민정비서실 행정관 △민선 제1∼3회 구미시장,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공동회장, 전국지역균형발전협의체 공동회장 △민선 제4∼6회 경상북도지사(현) 전국 시·도지사협의회 한미 FTA 대책 특별위원장, 전국 시·도지사협의회장, 중부권정책협의회 회장 △사회보장위원회 위원,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상임고문 △캄보디아 훈센 총리 문화정책고문(현)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