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안평대군, 반역자 인가 희생자 인가

입력 : 2018-04-14 03:00:00 수정 : 2018-04-13 20:37:56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승자가 쓴 ‘단종실록’에 의존/ 오늘날까지도 논쟁 이어져/ 저자, 당시 시문·주변 작품 분석 / 600년전 안평의 삶 재구성/ ‘몽유도원도’로 자신의 처지 달래/
“시대 잘못만난 천재예술가”평가
심경호 지음/알마/7만원
안평-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심경호 지음/알마/7만원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은 왕이 되려고 했을까. 자신이 왕이 안 되더라도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랐던가.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 일이 있었는가. 속내는 물론 알 수 없다. 계유정난 직후 단종이 반포한 교서에는 “무사들을 몰래 양성하고 변방 고을의 무기를 가만히 들여와 불궤를 도모했다”라고 적혀 있다. 물론 당시 실권자 수양대군의 겁박 아래 나온 단종의 교서였다.

지금까지 안평에 대한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안평에 대한 지금까지 내용은 대부분 날조된 단종실록에 근거한다고, 이 책 저자인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 교수는 주장한다.

저자는 600년 전 살았던 안평을 재구성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들을 동원했다. 단종실록을 통해서는 안평대군의 실상을 파악할 수 없었다. 저자는 동시대의 시문을 모으고, 주변 인물들의 작품을 통해 안평의 실상을 그려낼 수 있었다.

수양은 왜 그토록 안평을 죽이려 했을까. 안평은 애초 예술가였다. 그림도 잘 그렸고 글씨도 조맹부체를 닮아 유려하고 힘이 넘쳤다. 당시 양반 귀족들의 지식의 척도는 한시였다. 태종, 세종 대에 안평만큼 한시를 자유자재로 읊은 문인은 거의 없었다니 천재라 할 만했다. 안평과 같이 공부했던 네 살 위 형인 문종도, 한 살 위인 수양도 안평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 안평대군이 어느 날 밤 꿈 속에서 봤다는 신비로운 도원경을, 당대 최고 화원 안견에게 그리게 한 걸작으로 전해진다.
연합뉴스
수양은 죽을 때까지 한시를 제대로 못 지었다니 안평에 대해 열등감을 품을 만도 했다. 저자는 수양이 안평을 죽도록 미워했던 첫 번째 이유로 열등감을 꼽았다.

두 번째는 왕권 도전 세력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머리 좋고 똑똑했던 안평이기에 위협적인 인물로 비쳐졌을 것이다. 수양에게 안평은 정권에 위협을 가할 만한 잠재 세력이었다.

문학예술 모임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정치행위로 간주된다. 사례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 예술가들의 친일파 논란도 그렇고, 현대에 들어서도 예술과 정치의 결합은 얼마든지 정치세력으로 간주되었다. 동유럽의 경우에도 반체제 인사들은 흔히 문학을 매개로 모여들곤 했다.

안평 역시 당대 천재 문사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를 논했을 것이다. 수양은 그런 동생 안평을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처참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저자는 “청백의 순수예술 세계를 꿈꾸던 안평대군의 삶을 ‘35년간의 몽유’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깨어나도 뒷맛이 씁쓸한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는 그렇게 탄생했다. 안평은 1447년 당대 최고의 화원 안견에게 꿈속에서 본 무릉도원을 그리게 했다. 안평은 이를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던 처지를 달랬을 것이다.

저자는 “왕의 아들이면서 지성인들의 모임을 주도했던 안평의 행위는 실제 목적이야 어떻든 그 자체가 권력의 현시로 간주되었다”면서 “이것이 안평대군의 비극”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안평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 예술가였지 반역자는 아니었다고 풀이한다. 아울러 책에는 당대 문사들과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와 작품들이 해설과 함께 실려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