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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라이프] '남북한 약사 1호' 이혜경씨 "통일의 바람 담아 '하나약국'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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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1-20 16:00:00 수정 : 2018-01-21 18: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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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생활 초기엔 모든 게 공포 … 탈북민 힐링사업 중요” / 北 탄광병원서 약제사 12년 / 남한 출신 의사 어머니와 함께 ‘성분 불량자’ 분류돼 아오지로 / 탄전서 3년 일한 뒤 약대 진학 / 두 번의 탈북 끝에 南 정착 / 두 번의 탈북 끝에 南 정착 / 둘째딸 보러 재입북했다 체포 / ‘6·15선언’ 계기로 기적적 석방/ 남한서 다시 약대 졸업해 개업 / 성공적인 탈북자 사회 꿈꿔 / 온갖 '알바'하며 통일학 박사 취득 / 탈북 트라우마 치료 단체 세워 / "정부의 제도적 종합 관리 필요"
“그분이 나를 좀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지난 4일 국회 의원회관. 탈북민 정책 세미나에 발표자로 나선 이혜경(53·여)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북한에서 의사로 일하다 탈북한 탈북민 A씨가 2016년 빌딩 청소를 하다 추락사한 사례를 소개하고, 탈북민의 경력단절 문제와 정착 지원정책의 미비점을 지적하면서다. 이씨는 이날 세미나에 ‘남북한 약사 1호’로 소개됐다. 이씨는 북한에서 함흥약학대학교를 졸업하고 12년간 약사 생활을 하다 2001년 탈북해 우리나라에 정착했다. 남한에 정착한 뒤에는 삼육대 약학과에 편입학해 약학고시에 합격했다. 15일 이씨가 운영하는 경기도의 한 약국에서 이씨를 만났다. 약국 이름은 ‘하나약국’. 이씨가 통일의 바람을 담아 직접 약국 이름을 지었다.

◆두 차례의 탈북

이씨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씨 어머니는 의사였다. 6·25전쟁 당시 서울 성신여고에 다니다 납북됐다. ‘북한에 가면 대학에 무상으로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지만 남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성분 불량자’로 분류돼 가족 모두가 함경북도 아오지 탄전으로 추방됐다.

“김정일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한 출신자들을 배척하고 숙청, 청산하면서 우리 가족도 평양에서 아오지 탄전으로 추방을 갔습니다. 남한 출신이라는 죄 아닌 죄 때문에.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그늘막이 돼 괜찮았을 텐데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의사 가운을 벗고 탄광일을 했다. 이씨는 “탄광에서 일을 하니 옷이 까맣게 되잖아요. 그야말로 화이트 칼라에서 블랙 칼라가 됐지요”라고 했다. 이씨 역시 고등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탄전에서 3년을 일하고 나서야 어렵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생은 북한의 민족간부입니다. 이 사람이 민족간부가 될 기준이 되는가. 성분이 좋아야 하고, 혁명성과 당성을 인정받아야 대학에 갈 수 있는데 일단 성분이 불량하니까요. 3년간 검증을 받고 ‘민족간부가 될 만하다’는 인정을 받고 나서야 대학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약대에 진학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이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탄광 병원에서 12년 동안 약제사로 일했다. “남한처럼 의사나 약사가 수입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탄부보다 월급이 적었어요. 배급도 안 주고 월급도 안 나왔어요.”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그 무렵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사사여행자(보따리상)를 통해 이씨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이씨의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남한에 살아 있다는 소식이었다. 

먼저 이씨 어머니가 북한을 탈출했다. 이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딸을 데리고 탈북했지만 둘째딸이 눈에 밟혀 재입북했다. 재입북과 동시에 국경경비대에 체포돼 6개월 동안 구금생활을 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남한 관련 정치범 석방이 이뤄지면서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죽으란 법이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북한에서는 6·15 정상회담을 ‘6·15사변’이라고 불렀어요. 적대국 남조선 대통령과 회동을 하게 된 것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제 자료가 정치범 수용소로 넘어간 상황이었는데 무죄 석방이 됐습니다. 6·15 특사지요. 8개월 만에 어미를 만난 둘째딸이 어미를 못 알아보고 도망을 갔습니다. ‘엄마는 두만강을 건너가다가 죽었다’고 들었으니까요.”

이듬해인 2001년 이씨는 둘째딸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다.

◆두 번째 약대생으로

“하나원의 직업진로 교육은 북한에서 가졌던 직업을 절대로 고집하지 말 것, 북한의 경력을 고집하면 오히려 정착에서 퇴보를 가져오니 나가면 제일 밑바닥부터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열심히 하는 것이 정착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씨는 남한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김 공장에서 김 굽는 일부터 파출부, 빌딩청소부, 마트사원 등 일을 가리지 않았다. 일당 9만원을 준다는 구직광고를 보고 찾아갔다가 유흥업소라는 사실을 알고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이씨는 “2년간 닥치는 대로 일하다 보니 ‘남한에서 굶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공허감이 몰려왔다”고 했다. 공부를 시작했다. 

‘남북한 약사 1호’로 불리는 이혜경씨가 15일 자신이 운영하는 ‘하나약국’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씨는 “탈북민에 대한 인식 개선이 중요하다. 탈북민도 남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첫번째”라고 강조했다.
이재문 기자
이씨는 먼저 대학원에 등록했다. 낮에는 파출부로 일하고 밤에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통일학을 공부했다. 대학원 석사과정 지도교수였던 류길재 전 통일부장관과 대학원 원우들이 다시 약사로 일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이씨의 마음이 움직였다. 북한에서의 약사 자격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보건복지부를 찾아갔지만 북한 대학 졸업증이 없으니 국가고시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북한 대학 졸업증을 어떻게 지참하느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길에 나서면서 유학 떠나는 사람처럼 대학 졸업증을 챙길 수 있느냐고 했지만 ‘그건 당신 사정이고 우리는 모른다’고 딱 잘라버렸습니다. 정부청사 건물 앞에서 눈물을 삼키는데 오히려 오기가 생겼습니다.”

이씨는 약학과가 있는 대학에 자기소개서와 입학지원서 메일을 보냈다. 회신이 없거나 거절 메일이 돌아왔다. 나중엔 대학을 직접 찾아다녔다. 삼육대학교 약학과에서 이씨의 편입학을 허락했다.

그리고 또다시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등록금고지서가 집에 도착했는데 입학금까지 500만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탈북민의 경우 35세 미만이면 정부지원으로 대학 학비가 전액 무료이지만 저는 35세 이상이라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수입 없이 4년을 버텨낼 수 있을지, 다시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했지요.”

이씨는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이씨는 “새벽 5시까지 신문배달을 마쳐야 했다. 집에 들어와 물 한 컵 들이켜고 아이들 밥짓고, 7시에 집을 나서야 9시에 시작하는 1교시 수업이 보장됐다”고 했다. 아이들 용돈 생각에 학교 식당 라면값이 600원에서 1000원으로 오르고 나선 가끔씩 먹던 점심을 아예 굶기로 했다. 이씨는 “그래도 옷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아파트 1층에 있는 의류수거함에 가면 옷뿐 아니라 신발, 가방들로 멋쟁이가 될 수 있었다”며 웃었다.

이씨는 대학 4년 내내 연구실 청소 등 근로 아르바이트와 야간 전단지 아르바이트, 방학에는 모텔 청소, 드라마 엑스트라까지 하며 학비 마련과 생활비를 위해 뛰어다녔다. 이씨는 “20대 공부하는 것과 40대에 공부하는 것이 같겠어요. 배로 힘이 든다. 장학금을 받지는 못했다”며 웃었다.

북한에서 의학공용어인 라틴어를 배웠기 때문에 기본적인 의학용어 읽고 쓰기가 가능했지만 영어원서 수업은 특히 힘들었다. “교수님은 수업에서 ‘산화’라고 우리말로 해도 될 것을 구태여 옥시데이션(Oxidation), Redutation(환원), Pola(극성), Nonpola(비극성) 등의 용어를 써서 곤혹스러웠습니다. 학과공부가 끝나고 종로 영어학원에서 알파벳부터 다시 공부했습니다.”

이씨는 2014년 3전4기 끝에 약학고시에 합격했다. 서울 송파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이씨는 최근 경기도에 약국을 새로 열었다.

◆탈북민 지원활동도

이씨는 대학원 공부도 틈틈이 이어가 2013년 ‘북한의 보건일꾼양성정책 연구-체제수호 전위 양성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엔 탈북 청소년과 여성을 중심으로 탈북 과정에서 생긴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새 삶’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씨는 “성공적인 탈북자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6개월 동안 구금생활을 하고 고문을 받으면서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도 처음에는 모든 것이 공포입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 걱정도 큽니다. 탈북민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힐링 사업이 중요하다는 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이씨는 탈북 청소년, 여성 탈북민들과 함께 멘토링 수업과 독서 모임, 발표·토론 모임 등을 진행하고 있다.

탈북민의 경력단절 문제도 거듭 지적했다. “2016년에 사망한 탈북민의 일기를 보면 의사고시를 보겠다고 생각했지만 가족을 보살펴야 하니 일용직 노동을 하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먼저 남한에 정착한 선배들이 도움을 주지 못한 것도 원인이지만 정부 역시 제도적으로 종합 관리가 필요합니다.”

박영준 기자 yj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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