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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토정비결에 투영된 이지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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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1-18 21:05:06 수정 : 2018-01-18 21: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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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저술 아닌 이름 빌려 쓴 책 가능성 / 후대 이어진 그의 애민정신 녹아있어
한 해를 맞이하는 새해가 되면 누구나 운세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점을 보러 가는 사람도 늘어나고, 요즈음에는 인터넷을 통해 운세를 보기도 한다. 이 중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운세서가 ‘토정비결’이다. 토정비결’은 태세(太歲), 월건(月建), 일진(日辰), 즉, 연(年), 월(月), 일(日)을 숫자로 따져 한 해의 신수(身數)를 보는 데 사용했는데, 주역의 음양설에 근거하고 있다.

주역의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연, 월, 일을 사용하기 때문에 보다 간단하다. 주역의 기본 괘는 64개로 ‘토정비결’의 48괘와 차이가 있다. ‘토정(土亭)’이 이지함(李之?·1517~1578)의 호이고, ‘비결(秘訣)’이 예언서란 뜻을 지니고 있어, 대부분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저술한 운세서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지함의 저술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가탁(假託·빌려서 씀)한 책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후기 숙종 때 이지함의 문집인 ‘토정유고’를 간행할 때 ‘토정비결’이 빠져 있고, 조선후기에 세시풍속을 정리한 책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에, 오행점(五行占)이나, 윷점이 가록된 반면,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이런 점을 뒷받침해 준다. ‘토정비결’이 유행했다면 당시 세시풍속에 관한 책에 반드시 소개됐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보면 ‘토정비결’은 빨라야 19세기 후반 이후 유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 왜 ‘토정비결’에는 그보다 300년 전을 살아간 학자 이지함의 이름을 넣은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이지함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지함은 한산 이씨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일생의 대부분을 유랑생활로 보내면서 백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국부(國富) 증대와 민생 안정을 위해 농업 이외에 수공업, 어업, 염업과 같은 산업 개발을 추진했으며, 노숙인 재활원에 해당하는 걸인청(乞人廳)을 설치하기도 했다. 상인, 노비, 서얼 등 신분이 천한 사람까지 문인으로 받았으며, 가난한 사람과 어울리며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점술이나 관상비기(觀象秘記)에 능했다”는 기록에서 보듯, 앞날을 예견하는 능력은 그에 대한 신뢰를 더 크게 했을 것이다. 이지함에 대한 기억과 명성은 후대까지 이어졌고, 이후 비결류의 책을 저작하면서, 그 명성을 활용한 ‘토정비결’로 나타났다. 이처럼 ‘토정비결’에는 백성들의 앞날을 걱정하고, 구체적으로 그 고민을 해결해 주었던 이지함의 애민(愛民)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는데,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나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것을 극복하면 희망이 옴을, 희망적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힘이 있다. ‘토정비결’은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책에서 나아가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책이기도 한 것이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던 이지함의 모습은 ‘토정비결’로 인해 더욱 깊이 각인되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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