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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팔각정’에는 불나방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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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14 23:19:00 수정 : 2017-07-14 23: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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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가난한 커플의 흉내를 내보고 싶었어.”

서울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화려한 야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여자친구 K가 문득 이런 말을 건넸다. K는 소설가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단편집에 등장하는 가난한 커플 이야기를 했다. 자가용도, 택시비도 없는 그들에게 북악스카이웨이를 쭉 따라 올라와야 하는 팔각정에 도달하기란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 사치에 가깝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팔각정 난간 팔걸이에 다닥다닥 몸을 붙이고 선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도시의 불빛이 만들어낸 불야성 쪽으로 몸을 기울인 사람들은 화려함을 좇아 모여든 불나방 같았다.

사회 초년생인 K는 소득 수준이 높은 전문직 부모보다 경제적 수준이 오히려 몇 단계 하강했다고 생각해 박탈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경제적 풍요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서였을까. 최근 내 생일을 맞아 찾은 데이트 코스는 한국의 ‘부촌’인 평창동이었다. K는 높은 장담의 고급 주택가가 늘어선 골목길을 한참 산책하다가 택시를 잡아 팔각정으로 향했다. 택시비를 아낌없이 지출하고 팔각정 카페에서 비싼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며 호기를 부린 것은 나름대로의 ‘작은 사치’였던 셈이다.
안병수 체육부 기자
K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오랜만에 연애를 글로 배워보았다. 과하게 비싸지 않은 것에 자기만족을 위해 돈을 쓰는 트렌드를 ‘스몰 럭셔리’라 부른다. 최근 백화점 업계는 작은 사치를 즐기는 사람들을 겨냥해 식품관에 수입 프리미엄 디저트 판매장을 늘리고 있다. 주 소비계층은 20~30대의 젊은 세대다. 오세조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치를 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갖고 있다. 그러나 경기가 어렵고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크게 비싸지 않으면서도 남들에게 보여줄 때 그 돈 가치 이상을 하는 것을 찾는다”고 분석했다.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서 나타난 신풍속도다.

그간 K의 행동패턴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K는 평소 명품 가방에 전혀 집착하지 않지만 가끔씩 6성급 호텔의 카페를 찾아 망중한을 즐기곤 했다. 경제적 능력을 고려한 맞춤형 사치다. K는 입버릇처럼 “부모님께 백화점 명품관에서 선물을 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소득 수준으로는 중저가의 선물을 백화점 세일 기간에 고르고 골라야 하는 처지다. 삶이 팍팍해지면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커졌지만 수단은 넉넉하지 못하다. 이 땅의 수많은 청춘이 겪고 있는 딜레마를 K역시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평창동 갤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K의 눈빛이 아른거리면서 마음이 저려왔다.

그러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가슴 아픈 동화일지언정 비극은 아닐 것이다. 팔각정의 수많은 불나방들은 갖지 못한 것을 좇기에 애처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비록 다음날이면 먹고 살기에 바쁜 고된 현실로 돌아가야 하지만 잠시나마 서울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생명력을 충전했을 것이다. 나와 K가 그려가고 있는 청춘의 자화상처럼 말이다. 정호승 시인의 한 시구가 떠오른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청춘을 견디기 힘들지라도/ 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은 굴비가 아니다/ 내 너를 굳이 천일염에 정성껏 절인 까닭을 알겠느냐.’(‘굴비에게’에서)

안병수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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