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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사람들] "가족에게 너무 큰 짐이 될까봐"… 혼자서 '끙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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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22 19:48:33 수정 : 2017-05-22 19: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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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나눌 곳 없어 혼자서 ‘끙끙’… 상담 인프라 확충 시급 / 단기적 충격 해소 못하고 병 키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대표적… 사회구조적 문제보다 심리요인 커 / 자살자들 인지 억제 등 증상 보여… 정신적 에너지 소진 사고력 떨어져… 상담전문가 늘리고 문턱 낮춰야
가장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온 A씨는 어느날 심한 복통이 느껴져 병원을 찾았다. 진찰 결과 ‘말기암’ 판정을 받고선 망연자실했다. 절망한 A씨는 얼마 후 가족들에게 짤막한 글을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 수술을 받으면 되겠지만 가족의 고통, 병원비를 생각하면 이게 맞는 것 같다. 사랑하고 미안하다.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나자.”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의욕을 잃고 사는 남편과 아버지의 고통이 클 것이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이런 선택을 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에게 너무 큰 짐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다 극단적인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 내용에 마음이 몹시 아프고 미안했다.


이처럼 A씨는 암 진단 후 급격히 무너졌다. 어떻게 헤쳐 나갈 방법은 없는지 알아보지도 못한 채 ‘가족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까지 겹쳐 혼자 끙끙 앓았다. 극도의 무기력에 시달리던 그는 끝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A씨 사례에서 보듯,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외부 충격과 열패감, 인간관계 단절 등 다양한 이유로 생긴 심리적 공황상태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다. 이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보듬어주면서 심리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적절한 처방책을 알려주는 상담 시스템 확충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이다. 

◆갑작스러운 충격… 고민을 나눌 데가 없다

청년 구직난과 노인 빈곤 심화, 급격한 가족해체 등은 높은 자살률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처럼 극단적인 선택이 줄지 않게 하는 사회구조적 요인을 제거하면 상황이 나아질까.

전문가들은 “일정 부분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는 ‘단기적인 충격과 상담 부재’의 영향이 크다는 판단에서다.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나 원만하지 못한 대인관계, 예상치 못한 질병과 사고 등으로 갑작스레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삶 자체에 회의감이 들 때 이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자살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2011년 충북의 한 농가에서 어머니에게 짤막한 글을 남기고 세상을 등진 20대 후반의 B씨.

원만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과도 잘 어울렸던 그는 군 제대 후 할아버지의 돼지농장을 물려받았다. 돼지 키우는 일이 좋았던 B씨는 농장을 잘 운영했다. 그런데 갑자기 구제역이 유행하며 큰 어려움에 빠졌다. 정성껏 기르던 돼지 300마리를 살처분한 것에 상심이 컸다. 돼지를 생매장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한 뒤 돼지들이 울부짖는 환청에 시달렸고 텅 빈 축사를 보며 흐느껴 울 때도 있었다. 심리부검 결과 B씨의 비극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판명됐다.

B씨와 비슷한 증상을 겪다가 같은 선택을 하는 농·축·어업 종사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정성 들여 가꾸거나 기른 농축수산물을 질병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한꺼번에 잃을 경우 충격과 고통이 엄청나지만 적절한 상담과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한 결과다. 

도시 직장인 중에도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갑자기 업무환경이 달라지거나, 마음에 맞지 않는 상사나 동료와 일하게 되는 등 괴로운 상황에 놓인 경우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경쟁적인 업무 분위기에 짓눌려 돌파구를 쉽게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자살이라고 하면 흔히 ‘노년기 빈곤’이나 ‘청년실업’ 등 사회구조적 요인 탓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심리적 요인이 급격히 악화된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조력자의 존재, 희망의 끈

관건은 외부 충격이 발생했을 때 ‘자살 방아쇠’가 작동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자살충동을 조장하는 환경 △조력자 부재 △모방자살 조장 △가까이서 찾을 수 있는 자살도구 등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이 특히 조력자의 부재를 문제로 꼽는다. 자살충동을 느끼지 않도록 심리적 공황 상태를 풀어줄 만한 상담 전문가와 기관 등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살자 대부분 결단하기 전에 ‘인지 억제 현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조력자의 존재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인지 억제 현상이란 정신적 에너지가 소진돼 더 이상 논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대 유서에 종종 ‘세상에 홀로인 듯하고 가족에게 미안한데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등장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 같은 상태의 사람들에게 고민을 나누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도록 돕는 존재의 중요성은 무엇보다 크다. 그러나 국내에 전문가와 상담기관 등이 턱없이 부족하고 즉각적이고 충실한 상담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캐나다 사이먼프레이저대학교 심리학과 연구원인 서종한 박사는 “해외에선 ‘자살 충동이 들면 언제든 상담을 받으라’는 광고를 공공기관이나 버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며 “우리도 해외에서와 같이 상담의 문턱을 낮추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부 경찰팀=강구열·박현준·남정훈·박진영·김범수·이창수·배민영 기자 hjun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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