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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기획] 생계형 범죄자 돕는 '장발장은행' 아시나요

입력 : 2017-04-10 18:24:46 수정 : 2017-04-10 18: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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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담보·이자 없이 벌금 대출… 딱한 '교도소 노역' 막는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주인공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 때문에 장발장은 힘도 돈도 없어서 가혹한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대명사로 불렸다. 소설의 배경이 된 약 200년 전과 시대상황이 전혀 다른 오늘날에도 ‘현대판 장발장’을 떠올리게 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 중 벼랑 끝에 내몰리자 순간적으로 경미한 범죄를 저질렀다가 받은 벌금형을 감당할 수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같은 벌금 액수라도 당사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벌금형의 무게감은 달라진다. 이에 따라 소득이나 재산을 감안해 벌금 액수를 정하는 등 가난한 죄인들에게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는 벌금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벌금 50만원 때문에… 현대판 장발장 낳는 팍팍한 현실


경기도에 사는 주부 김모(32)씨는 2015년 말 생활고에 못 이겨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 명품 가방 대여 업체 2곳에서 가방 3개를 빌려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145만원을 생활비로 충당한 것. 범행이 발각돼 지난해 말 횡령 혐의로 벌금 300만원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세 자녀를 둔 김씨 부부는 신용불량자가 된 지 오래여서 여력이 안 됐다. 두 사람은 6년 전 은행에서 1500만원을 빌린 이후 저축은행 등 금융기관 10곳에서 대출을 받아 기존 대출금을 상환하는 ‘돌려막기’의 수렁에 빠졌다. 남편이 급여를 압류당한 뒤 2015년 3월 직장을 그만두고 일용직으로 공사장을 전전하면서 생활은 더 팍팍해졌다. 김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발장은행’의 문을 두드린 뒤에야 교도소행을 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박모(44·여)씨는 2015년 9월 사문서 위조, 위조 사문서 행사 혐의로 벌금 200만원의 약식 명령을 받고 법원에 정식 재판을 청구해 지난해 1월 벌금형 50만원에 처해졌다. 수년 전 직장 동료의 주민등록증 사본을 몰래 사용해 인터넷에 가입한 게 화근이었다. 박씨는 “인터넷을 잠깐 쓰다 해지하면 되겠지 하고 잘못 생각했다”며 “가입과 달리 해지는 본인만 할 수 있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명의 도용 사실을 안 동료의 고소로 경찰에 불려갔다. 50만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 애를 태웠다는 박씨는 “벌금을 못 내면 몸으로 때우면 되겠지 생각하다가도 식구들 생계와 사회 부적격자란 낙인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장발장은행에서 선뜻 돈을 빌려줘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시민단체 인권연대가 주축이 돼 2015년 2월 문을 연 장발장은행에는 이 같은 사연들이 넘친다. 기존 은행과 달리 담보, 신용 조회, 이자가 없는 ‘3무(無) 은행’을 표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한 곳 비빌 언덕이 없는 벌금 미납자들에게 최장 6개월 거치, 1년 균등 상환을 조건으로 최대 300만원을 지원한다. 이런 조건이 아니라면 그들이 돈을 빌리고 갚을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기준 개인과 교회 등 민간단체 4000여명의 기부금(7억여원)으로 운영되는 장발장은행은 현재 33차례 심사를 거쳐 451명에게 총 8억5993만7000원을 대출해 주며 ‘성업’(?) 중이다. 

◆벌금제 개선 목소리 높아… 형평성 논란 등 반론도


10일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벌금 미납으로 노역장에 유치된 사례는 △2012년 3만5449건 △2013년 3만5733건 △2014년 3만7692건 △2015년 4만2689건 △2016년 4만2668건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간 연평균 3만8846건에 달한다. 현행 형법상 벌금은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안에 현금으로 한번에 내야 하고 벌금 미납자는 1일 이상 3년 이하의 기간 동안 노역장에 유치된다. 하루 노역으로 탕감되는 금액은 통상 10만원이다. 2011∼2014년 전체 벌금형(확정 기준) 중 1000만원 이하가 99.7∼99.8%를 차지했다. 특히 500만원 이하가 전체의 97.1∼98.6%에 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노역장 유치 처분을 받은 상당수가 벌금을 낼 형편이 되지 않은 경범죄자들로 짐작된다.

이런 이유로 제도 개선이 모색되고는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나 장애인 등은 검사의 허가를 받아 벌금 분할 납부와 납부 연기가 가능하다. 다만 ‘재산형 등에 관한 검찰 집행사무규칙’에 규정돼 있어 법적 근거가 약하고 신청률이 높지 않다.

지난해 1월에는 △500만원 이하 벌금형에 대한 집행유예 도입 △벌금 분납과 연납 법제화 △신용카드사 등 납부대행기관을 통한 납부 방법 도입 등을 골자로 형법과 형사소송법이 개정돼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외에도 벌금제의 형평성을 제고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독일·스웨덴·핀란드처럼 같은 범죄라도 재산과 소득에 따라 벌금 액수를 달리하는 ‘일수벌금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경희대 서보학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벌금형은 부자들에게는 형벌로서의 효과가 전혀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중한 형벌이 될 수 있다”며 “실질적인 사법 정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 일수벌금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법무부 관계자는 “소득이 제대로 파악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처벌과 관련해 형평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며 “일수벌금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반박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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