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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007은 잊어라"…영화보다 극적인 첩보원의 진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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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05 08:00:00 수정 : 2017-03-05 11:4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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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펙터에서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분)가 설원에서 경계를 취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액션이나 스파이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독주에 가까운 보드카 마티니를 독특한 방식으로 주문하는 제임스 본드를 기억할 것이다. 제임스 본드는 런던에서 제작된 최고급 수제 양복이나 턱시도를 입고, 주머니에는 발터 PPK 권총을 숨긴 채 영국 정보부 MI6의 지시를 받아 첩보 임무를 수행한다. 영화 도중 제임스 본드의 남성적인 매력을 강조하기 위한 수영신이 등장하고 아름다운 본드걸과의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자동차인지 탱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닌 본드카와 첨단 스파이 장비들의 향연도 필수다.

007영화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장치와 이미지는 1962년 ‘닥터 노(Dr. No)’ 이후 변함없이 유지되면서 이후 등장한 스파이 영화인 본 시리즈나 킹스맨 등과 실제 첩보원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실제로 정보수집이나 암살 등 공작활동에 종사하는 첩보원들의 모습은 영화와는 큰 차이가 있다. 신분이 드러나면 정보세계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길을 걷다가 흔히 마주치는 시민들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가짜 신분을 사용하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

◆ 양복에 매너에 액션까지…영화 속 첩보원들

첩보원에 대한 대중들과 문화계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그려진 영화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다. 이안 플레밍이 쓴 소설에 기반한 007 시리즈는 1962년부터 2015년까지 24편이 제작됐다. 
본 시리즈의 주인공 맷 데이먼(제이슨 본)은 007 시리즈에 진부함을 느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제임스 본드의 코드명인 007에서 00은 영국 정보부 MI6에서 발급한 살인면허다. 007은 살인면허를 가진 7번째 요원이라는 뜻이다. 영국 해군 중령 신분의 현역 군인이기도 하다. 원작 소설에 따르면 제임스 본드는 1922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이튼 학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3개 국어를 구사하며 사격술, 격투기에 능하다. 영화에서는 원작에서의 진중함을 덜어내고 위트 있는 모습과 여성편력을 부각시키는 등 남성적인 매력과 화술을 강조했다. 뛰어난 매력과 능력을 갖춘 제임스 본드는 영화에서 첩보활동을 펼치다 스펙터 조직 등 악당들의 음모로 위기에 처해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임무를 완수한 뒤 본드걸과 함께 해피엔딩을 맞는다. 이런 스토리가 24번 반복되면서 제임스 본드의 활동무대는 우주로까지 뻗어나갔으며, 그에게 죽음을 당한 악당만 300여명이 넘는다.

40여년 동안 이어진 007 시리즈에 맞서 2002년 처음 등장한 영화 본 아이덴티티는 첩보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개봉한 제이슨 본까지 5편이 제작된 본 시리즈는 007 시리즈와 상반된 캐릭터 제이슨 본을 만들어냈다. 제이슨 본은 여성편력이 심했던 007과 달리 한 여자만 바라보며, 첨단 장비 대신 수건이나 볼펜 같은 생활도구와 절권도 등 실제 무술에 의존해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인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여 007에 진부함을 느낀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영화 킹스맨에서 해리 하트(콜린 퍼스 분)가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는 대사로 유명한 영화 킹스맨(2015)은 007 시리즈의 전통적 매력에 B급 코드를 뒤섞은 첩보 액션 영화다.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 같았던 해리 하트(콜린 퍼스 분)는 꽃중년 외모에 런던 최고의 양복점에서 제작한 최고급 수제 양복을 입고 세련된 말투를 구사하며 매너를 강조한다. 매너 없이 날뛰는 동네 건달들을 단번에 제압하는 격투술도 지녔다. 혈통을 강조하는 구시대적 분위기의 킹스맨 조직에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잠재력이 뛰어난 에그시(테런 에저트 분)를 데려오는 혜안도 갖췄다. 여성편력만 더해지면 영락없는 20세기 007의 모습이다.

◆ 영화와 다른 실제 첩보원…“평범한 이웃 모습”

영화에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 등의 모습을 보면 첩보원 생활이 매우 화려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정보활동을 펼치는 첩보원들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평범한 시민에 가깝다. 가장 위험한 첩보원은 특별한 직업이 없는데도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고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이 아닌, 회사에 근무하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이웃들에게 친절하며 의심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발표한 김정남 피살사건 용의자들. 모두 북한 국적자들로 현지 경찰은 CCTV와 출입국 기록 등을 토대로 이들의 신원을 밝혀냈다.

이들은 공작 대상국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다 본국 정보부의 지령을 받으면 행동을 개시해 정보수집, 암살 등 임무를 수행한다. 1974년 5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를 사임하게 한 동독 스파이 귄터 기욤은 1956년 서독에 잠입해 사민당에서 활동하다 1970년 총리실 직원이 된 직후 동독으로 기밀자료를 빼돌렸다. 기욤은 체포되기 전까지는 근면한 태도로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김정남 피살사건으로 지난달 17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체포됐다가 지난 2일 추방결정이 내려진 북한 남성 리정철도 표면적으로는 2013년 말레이시아에 입국해 가족과 함께 지낸 외국인 근로자였다. 리정철은 사건 발생 전까지 이웃의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정체를 말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첩보원들은 경계인으로서의 삶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역사상 가장 대담한 첩보원으로 평가받는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 엘리 코헨은 매력적인 미소를 가진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1965년 5월 시리아군에 체포돼 사형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 돌아온 1964년 11월, 그는 어둡고 과민하며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시리아에서의 첩보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김정남 피살 당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CCTV에 포착된 여성용의자 도안 티 흐엉. 말레이시아 경찰수사 과정에서 CCTV가 큰 역할을 했다.

주도면밀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첩보원이라도 인간적인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스파이로 활동하던 에이미 서프 팩은 첩보활동을 위해 유혹한 비시 프랑스 정부 정치인과 사랑에 빠져 1944년 그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여생을 마쳤다. 1967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에 공헌한 모사드 요원 볼프강 로츠는 이집트에서 함께 활동하던 서독 정보기관 여자 요원과 사랑에 빠져 모든 명예를 포기한 채 진짜 부인과 이혼하고 독일로 건너가 함께 살았다. 1973년 7월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검은 9월단 수장 알리 하산 살라메를 암살하려던 모사드 요원 실비아 라파엘은 현지 경찰에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역경 속에서도 당당함과 품위를 잃지 않은 그녀였지만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평범한 여인일 뿐이었다. 그녀는 감옥을 나온 후 재판에서 자신을 지켜줬던 변호사와 결혼해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이렇게 정보세계에서 수많은 에피소드를 낳으며 공작활동의 핵심 역할을 한 첩보원이지만 21세기 들어 그 기반이 위협받고 있다. 위조여권에 가발을 쓰고 수염을 붙여 공항을 통과하던 첩보원들은 눈의 홍채나 얼굴 인식 기술이 발전하면서 각국 정부와 테러 조직, 범죄 조직도 이같은 기술을 활용해 보안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진짜 신분을 숨기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 각국이 보안 강화를 위해 CCTV와 홍채인식 기술을 적극 도입하는 과정에서 첩보원들의 신분 위장 등 전통적 방법이 위협받고 있다.

홍채 정보가 기록에 남으면 첩보원들은 발각을 피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진다. 생체인식 기술과 더불어 폐쇄회로TV(CCTV)와 인터넷 추적 장치도 첩보원들의 신변을 위협한다. 지난 2010년 팔레스타인 하마스 고위간부 마흐무드 알-마부 암살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모사드가 동원한 암살단이 두바이의 한 호텔에 침입해 가발을 쓰고 테니스 복장을 하는 등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마흐무드 알-마부를 살해하고 달아났지만 이들의 신원이 낱낱이 폭로돼 결과적으로는 참혹한 실패로 기록됐다. 두바이 공항 입국장과 터미널 게이트, 호텔 로비와 복도에 설치된 CCTV에는 암살단의 동선이 1초 단위로 기록됐다. 두바이 경찰은 CCTV 영상과 위조여권 사진, 입국 기록, 신용카드 영수증 등을 취합해 암살에 연루된 이스라엘 정보요원 27명의 신원을 밝혀냈다. 김정남 피살사건에서도 말레이시아 경찰은 CCTV 등 디지털정보를 수집해 사건 가담자를 모두 식별할 수 있었다.

현재 각국은 유전자표본을 수집, 분석해 신원을 확인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유전자표본 신원 확인은 시간이 오래 걸려 현재는 활용도가 낮지만, 10여년전엔 수주일 걸리던 것이 수시간으로 짧아진 만큼 미래에는 수분 단위로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유전자표본 감식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면 성형수술로도 첩보원의 신원을 숨길 수 없다. 디지털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기반을 위협받는 첩보원들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따라 2020년대 정보기관의 정보수집과 공작활동 기법의 패러다임이 크게 변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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