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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대한민국 군인들은 '뼛속까지' 친미주의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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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29 08:00:00 수정 : 2017-01-29 10: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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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득)는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to the core) 친미’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 2011년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던 위키리크스의 미 국무부 외교전문 폭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내용이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의 발언을 담은 2008년 5월29일자 주한 미 대사관 외교전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역사가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 외교관에게는 현실세계에서 직면한 가장 큰 악몽’으로 불리는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국익을 외치던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대중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얼마나 친미적인 성향을 띠는 지를 여과 없이 노출해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2013년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한미 관계는 일본, 러시아, 중국 등과는 다른 특수성이 존재한다. 정치인과 외교관의 활동은 부차적인 것에 가깝다. 한미 관계의 근간은 군사동맹체제로서 한미 군 당국이 양국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우리 군 수뇌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주한미군과의 합동훈련에 적극적이며, 수십조원 규모의 미국제 무기를 도입해 운용하며 많은 장교들이 미국에서 공부한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군인들은 말 그대로 ‘뼛속까지 친미’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일까.

◆ 알려지지 않은 독일 육사 출신 군 수뇌부들

언뜻 보면 군 수뇌부는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군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수뇌부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 중에는 독일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사람이 적지 않다. 1964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서독 방문 직후 1965년 서독 정부가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한국-독일 육사생도 위탁교육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군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11월29일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과 함께 한미 연합사단을 방문한 한민구 국방부 장관. 국방부 제공
이 당시 서독 연방군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패배 직후 나치 독일의 잔재를 벗어던지고 혁신을 추구하던 시기였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했던 프로이센군이 샤른호르스트의 군제 개혁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고, 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해체 위기에 직면한 독일 국방군이 한스 폰 젝크 장군의 지도력으로 다시 일어섰던 것처럼 1960년대 서독 연방군도 ‘왜 우리가 패했는가’에 집착했다. 논의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면서 승전국의 군대보다 더 혁신적인 작전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독일 육사에 유학했던 우리나라 육사 생도들도 이같은 사조와 독일 철학의 근간인 합리주의 사상, 서양의 대표적 전쟁이론인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접하며 미군의 군사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우리 군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지난달 19일 전군 주요지휘관 화상회의를 주재하는 한민구(오른쪽) 국방부 장관과 이순진 합참의장. 국방부 제공
독일 육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육군사관생도들은 야전보다는 정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책 기획력이 좋다보니 상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청와대, 국방부, 국가정보원 등 군인과 민간공무원, 전문가들이 함께 일하는 곳에서 근무할 때가 많았다. 실무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사람이 나중에 군 수뇌부의 일원으로서 정책을 거시적인 틀로 바라볼 기회를 얻기도 했다. 대표적 사례가 김관진(육사 28기)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다. 김 실장은 진보와 보수 3대 정권을 넘나들며 외교안보분야 장관급 직책을 맡은 진기록을 갖고 있다.

1969년 독일로 건너가 3년간 공부한 김 실장은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2년 합참에 근무하면서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지휘관들에게 평시작전통제권 전환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평시작전통제권이 1994년 주한미군에서 우리 군으로 이양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합참의장으로 부임한 그는 국방개혁 2020을 추진하고 한미 동맹 조정을 통해 자주적 방위 태세를 구축하는데 골몰했다. 2012년 12월 연평도 포격도발로 만신창이가 된 군 조직을 추스르기 위해 국방장관에 취임해 “쏠까요, 말까요”식의 대응이 아닌 ‘선조치 후보고’를 강조하며 군에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 장관 시절 ‘원점타격’ 등 강경 발언을 쏟아낸 그는 북한으로부터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박근혜 정권에서도 국방장관직을 수행하다 2014년 6월 국가안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2015년 8월25일 북한 포격도발로 촉발된 남북 군사적 대치를 양측 합의로 해소하기도 했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보수와 진보 3대 정권에서 장관급 직책을 지낸 기록을 갖고 있다.
김관진 실장의 전임 장관이었던 김태영(육사 29기) 전 국방부 장관도 독일 유학파다. 김 장관은 이명박 정부에서 합참의장을 역임한 직후 2009년 9월 국방장관이 됐으나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 등으로 2010년 12월 물러나야 했다.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민군 합동조사단 군측 단장을 맡았던 박정이(육사 32기) 전 1군사령관도 독일 육사에서 공부했다. 최근 야인으로 돌아간 류제승(육사 35기) 전 국방부 국방정책실장도 독일 유학 경험을 갖고 있다. 독일 보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류 전 실장은 영관장교 시절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번역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작전사령관을 맡고 있는 박찬주(육사 37기) 대장도 독일에서 공부했다. 2012년 대선 당시 국군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사건의 한복판에 서있었던 연제욱(육사 38기) 장군도 사이버사령관을 맡기 전까지는 국방부 등 정책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 ‘미군이 없는 한반도’에 대한 두려움

독일 육사 출신을 포함해 정책분야에서 근무했던 군인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작성한 보고서나 논문들을 보면 무조건적으로 미국에 치우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새로운 한미 동맹체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더 많다. 하지만 국민들의 눈에 군의 행동은 친미주의자처럼 보인다. 미군이 한반도에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군 수뇌부에 여전히 남아있고, 이것이 미군에 의존적인 태도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설한지 훈련중인 특전사 대원들. 육군 제공
이같은 두려움은 6.25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반도에 주둔하던 미군은 대부분 철수한다. 북한이 6.25를 일으켰을 때, 우리 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3년간의 전쟁을 통해 우리 군은 미군의 화력을 두려워하는 북한군의 모습을 보며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휴전 직후 주한미군은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북한의 전면전 위협을 억제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우리 군은 미군과 긴밀히 협력하며 한미 관계 모멘텀을 군사동맹체제로 전환시켰다.

문제는 이같은 체제가 환경 변화에 소극적인 ‘경로 의존성’을 불러일으킨다는데 있다.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우리 군은 미군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아졌다. 무기체계와 조직 등도 ‘상호운용성’을 이유로 미국과 거의 동일해졌다. 미군의 억제력이 제공하는 군사적 안정에 익숙해진 군은 자발적으로 ‘판을 흔드는’ 일에 적극적인 모습을 띠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게 군 외부의 시각이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조건에 기초해 진행한다는 군의 입장이 처음 나왔을 때 “전환할 의지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던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2014년 9월 17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제6차 한미 통합국방협의체(KIDD) 회의에 앞서 한미 대표인 류제승 국방정책실장(오른쪽)과 데이비드 헬비 동아시아부차관보가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자주국방’이라는 개념 대신 연합 방위태세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한미 동맹체제는 한반도 안정에 가장 큰 역할을 한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현실에서 미군의 힘을 이용하는 용미(用美)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와 안정은 우리 힘으로 주도한다”는 의지가 없다면 한미 연합 방위태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처럼 ‘안보 무임승차’나 다름없다. 적대적인 중동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거듭되는 안보 위기에도 외국 군대를 자국 영토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인도의 위협과 탈레반의 준동에 시달리는 파키스탄도, 내전 중인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군은 어떤가.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미군 전략폭격기가 날아오고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될 것이라는 예측은 국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 힘으로 북한 도발을 억제한다는 결기가 안보인다”는 비판이 뼈아픈 대목이다. 우리나라 군 수뇌부들은 정말 친미주의자일까, 아니면 미국의 힘을 이용하려는 용미(用美)주의자일까. 임진왜란 당시 관군과 의병의 공은 평가절하하고 명나라 군대의 개입은 ‘재조지은’(再造之恩: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이라며 치켜세웠던 조선의 역사가 오늘날 한미 동맹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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