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민족정기 이어 온 당찬 삶, 오늘의 귀감이 되다

경북 영양 두 여성을 만났다/ 최초의 한글요리서 저자 장계향-여성독립운동군 남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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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은 많은 선비들이 은거하며 살았던 곳이다. 그만큼 유교문화가 뿌리 깊은 곳으로 여성이 차지하는 자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두 여성의 삶을 볼 수 있는 곳이 영양이다.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의 표상이 됐다. 이와 함께 남이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남이포와 선바위, 조선시대 3대 민간정원 중 한 곳인 서석지 등을 둘러보며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자.

◆‘현모양처’와 ‘독립군의 대모’

영양 두들마을은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 종택, 서당 등 오래된 기와집이 모여 있는 다른 지역의 집성촌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두들마을을 대표하는 것은 음식이다. 반가의 음식 조리법이 수백년 이어져 왔다.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 구두로 대물림된 조리법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340여년 전 두들마을에 자리 잡은 이시명의 부인 장계향 선생이 쓴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통해 그 전통이 전해졌다. 장계향 선생은 ‘음식디미방’을 쓴 것 외에도 시서화에도 뛰어났고, 사재를 털어 빈민을 도운 사회사업 활동을 한 인물이다.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 선생.
음식디미방 조리법에 따라 만든 음식 모형이 전시돼 있다.

‘음식디미방’의 디미는 맛을 본다는 의미의 ‘지미(知味)’를 당시 한글 발음으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당시 경상도 지방의 양반 집안에서 실제 만들던 음식 조리법과 술 빚는 법, 식품보관법 등 146가지 요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시대 등 과거 음식 조리법 등을 쓴 책이 있지만, 대부분 남성들이 쓴 것으로 세밀한 조리법까진 다루진 못하고 있다.
음식디미방 전경.
음식디미방이 있는 두들마을 전경.
1960년대 집안 서고에 잠들어 있던 ‘음식디미방’이 발견된 후 이시명의 13대 종손 이돈씨와 부인 조귀분씨는 ‘음식디미방’의 음식을 재현해 일반에 소개하고 있다. 예약을 하면 두들마을 입구의 체험관에서 조선시대 전통 양반집안의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직접 고서에 있는 음식을 조리해 볼 수 있다.

장계향 선생이 조선의 전통적인 여성상이라면 200여년 후에 태어난 남자현 지사는 이런 모습과는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두들마을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남 지사 생가엔 그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과 비석만이 그의 행적을 알리고 있다. 남 지사가 가진 무게감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 있다.
남자현 지사 영정.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이 일어난 후 남 지사의 남편은 의병으로 나가 싸우다 숨졌다. 울분을 품은 채 시부모를 봉양하고 유복자를 키우던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47세 때다. 만주로 넘어가 서로군정서에 입단했다. 당시 만주 항일무장운동단체의 드문 여성대원으로 만주지역 무장단체의 통합, 군자금 조달, 여성들의 계몽을 위한 여성단체 조직 등에 나섰다.
독립군 대모로 불린 남자현 지사를 기리기 위한 비석.

이 같은 지원 활동뿐 아니라 그는 여성의 몸으로 직접 무장투쟁에 나섰다.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일제의 침략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자 나라 잃은 백성의 뜻을 알리기 위해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조선독립원’이란 혈서를 쓰고 손가락과 같이 흰 수건에 싸서 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 일로 ‘여성 안중근’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1925년에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을 시도하려다 밀고자 때문에 실패했고, 1933년엔 만주 전권대사 부토의 암살을 모의하다 붙잡혔다. 감옥에서도 그는 단식투쟁을 벌이다 병보석으로 나와 결국 순국했다. 남 지사의 이런 활동에 일제는 그를 ‘날아다니는 여자 장군’이라는 뜻의 ‘여비장’으로 불렀다고 한다. 최근 인기를 모은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의 모델이 바로 남자현 지사다. 
남자현 지사가 살았던 생가.
◆남이 장군 전설 서린 남이포

영양군 입암(立巖)면. 마을의 이름 입암은 서 있는 바위란 의미다. 의미 그대로 이곳엔 촛대처럼 생긴 선바위가 하천변에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선바위보다 양 갈래 흐르던 물이 한곳에서 만나는 곳에 있는 기암절벽 남이포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남이포와 선바위는 하천을 경계로 떨어져 있다. 남이포에는 조선시대 무장 남이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온다.
남이포와 하천을 경계로 떨어져 있는 선바위.
 
두 물길이 만나는 기암절벽 남이포. 남이 장군이 반란군을 토벌한 후 다시는 역모가 일어나지 않도록 물길을 돌려야 한다며 칼로 내리쳐 산줄기를 잘랐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남이 장군은 이곳에서 반란군을 토벌한 후 다시는 역모가 일어나지 않도록 물길을 돌려야 한다며 칼로 내리쳐 산줄기를 잘랐다고 한다. 남이 장군이 칼을 내리친 자리가 지금의 남이포다. 남이포 절벽은 울퉁불퉁하지 않고 칼로 자른 듯 깨끗한 직벽을 이루고 있다.
석문 정영방이 조성한 서석지.
남이포에서 차로 5분가량 떨어진 곳에 서석지(瑞石池)가 있다. 광해군 시절 벼슬을 버리고 은둔지사의 삶을 산 석문 정영방이 조성한 곳이다. 조선시대 3대 민간정원이라 불리지만 규모는 소박하다. 서석지에 들어서기 전에 담장 넘어 큰 가지를 뻗고 있는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수령 400년이 넘은 암나무로 주위에 수나무가 없는데도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이 정원의 주인공은 연못이다. 서석지는 상서로운 돌이 있는 연못이란 뜻이다. 아담한 크기의 연못은 오목하게 가운데가 들어와 있는 ‘요(凹)’자 형태를 띠고 있다. 움푹 들어온 곳에선 선비들의 절개와 지조를 뜻하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가 자란다. 연못에는 여러 형상을 한 많은 돌들이 놓여 있다. 연못을 파면서 나온 자연석들이다. 정영방 선생은 신선 세계로 들어가는 다리라는 뜻의 ‘동진교’, 바둑을 두는 돌 ‘기평석’, 문드러진 도끼자루를 상징하는 ‘란가암’ 등 돌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였다. 연못 안에 자신만의 신선 세계를 만들어 어지러운 세상과 거리를 두려한 듯 싶다.

영양=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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