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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60여년 전 한반도 뒤덮은 ‘아마겟돈’…“성탄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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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25 08:00:00 수정 : 2016-12-24 19: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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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어김없이 다가왔다.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거닐며 데이트를 즐긴다. 아이들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보냈다고 ‘믿는’ 선물꾸러미를 받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꾸러미를 풀어본다. 도심에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는 인파가 몰리고, 공항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해외에서 즐기기 위한 행렬이 길게 꼬리를 문다. 교회와 성당에서는 예배, 미사가 열린다. 비록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과 경기불황으로 크리스마스 열기는 예전보다 못하지만, 크리스마스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날임에는 변함이 없다.

6.25는 주민들의 일상을 모두 파괴했다. 피난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자유와 생존을 위해 정처없이 떠돌아야 했다.
하지만 66년 전 한반도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6.25 전쟁으로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한 상황에서 성탄 트리에 쓸 나무는 고사하고 가마솥을 지필 장작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맛있는 케잌이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 대신 미군이 먹다 버린 음식으로 끓인 ‘꿀꿀이죽’ 한 그릇을 먹으면 그 날이 크리스마스나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기약없는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은 생이별한 가족들을 찾아 해메고, 피난길에 버려진 아이들은 부모를 찾으며 홀로 울부짖었다. 66년 전 그 날, 크리스마스는 없었고 신도 자취를 감췄다. 그 빈자리는 슬픔과 절망, 분노가 대신했다.

◆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다…이별의 성탄절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6.25 전쟁 기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최고의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가수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의 1절은 6.25 전쟁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와 생이별의 아픔을 담고 있다. 바로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이다.

1950년 10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해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격했다. 한국군 6사단은 북-중 국경인 압록강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24사단은 신의주 남방까지 진출했다. 북한의 위기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중공군은 10월 말부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군과 유엔군에 공세를 가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위기를 맞았으나, 중공군은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청천강 북쪽 적유령산맥으로 이동했다. 중공군이 후퇴하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11월24일 ‘크리스마스 공세’에 돌입했으나 공세 시작 하루만에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부딪혀 큰 손실을 입고 같은달 30일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유엔군과 피난민 철수가 완료되자 미 해군과 공군은 집중 폭격을 통해 부두에 남겨둔 물자를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에 있던 미 제1해병사단은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수적으로 10배나 많은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12만여명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철수했다. 이것이 바로 미 해병대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되는 ‘장진호 전투’다. 당시 미 1해병사단은 동계 산악전 훈련을 받지 못했고 기본적인 방한복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모르핀도 얼어붙을 정도의 혹독한 추위 속에 12만여명의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함흥까지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면서 미 1해병사단은 전사 463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 동상 등 비전투손실 3659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미 1해병사단을 비롯해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한국군과 유엔군 10만5000여명은 같은해 12월 원산이 함락돼 퇴로가 끊기자 함경남도 흥남으로 집결했다. 공산 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십만명의 피난민들도 영하 27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흥남으로 몰려왔다. 12월 9일 맥아더 원수의 철수 명령이 하달되면서 15일 미 1해병사단 병력과 장비가 흥남부두를 출항한 것을 시작으로 24일 전 군이 철수를 완료했다. 

전차상륙함(LST)에 타기 위해 흥남 부두로 모여든 피난민들.
이 과정에서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600만t의 장비를 수송해야 하는 점을 들어 피난민 수송에 난색을 표시했으나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통역을 맡은 현봉학 박사(1922∼2007)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꿔 피난민 수송에 동의했다. 피난민 수송이 시작되자 흥남 부두는 배를 타려는 피난민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전차상륙함(LST) 한 척에 정원의 10배가 넘는 5000여명이 승선하고 승선인원 2000명인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1만4000여명을 태우는 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9만1000여명의 피난민이 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피난민들이 배를 타지 못하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수십년 동안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야 했다.

이 때 미 10군단장 알먼드 장군을 설득해 피난민들을 후송한 현 박사는 휴전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들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임상병리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2007년 뉴저지 주 뮬런버그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해병대는 흥남철수작전에서의 공로와 1950년 8월 해병대 문관 시절 미군의 최신 무기인 자동기관총을 공수해 열악한 장비 개선에 힘쓴 공로를 인정해 지난 19일 보국훈장 통일장과 해병대 핵심가치상을 현 박사에게 수여했다. 훈장과 상장은 이날 서울 남대문로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앞에서 열린 현 박사 동상 제막식에서 장녀 에스더 현 씨에게 전달됐다. 해병대는 현 박사의 공적을 기려 2002년 ‘명예해병’으로 위촉하고, 그의 해병대 문관 재직 기록 등을 국가보훈처에 제공했다. 보훈처는 현 박사의 공적을 인정해 보국훈장 서훈 결정을 내렸다.

◆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던 크리스마스 고지

삶과 죽음이 몇 초 만에 엇갈리는 전장에서 크리스마스의 낭만은 설 자리를 잃었다.

1.4 후퇴 이후 6.25 전쟁은 사실상 교착상태에 빠졌다. 여러 차례의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유엔군과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를 감행할 의지도, 능력도 떨어졌다. 양측은 ‘지는 전쟁은 피하자’는 전략 하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상에 돌입한다. 처음에는 몇 주면 휴전협정을 체결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문제를 놓고 양측은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전선 일대의 고지들을 둘러싸고 치열한 국지전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전투가 백마고지 전투, 베티고지 전투 등이다.

원산 인근에 있던 북한군 기차가 유엔군의 공습으로 파괴되고 있다.
휴전선 설정문제로 진통을 겪던 유엔군과 북한군은 1951년 11월 27일부터 30일간 잠정적인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했다. 하지만 30일을 채 채우기 전인 195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중공군은 조건부 군사 분계선 설정 합의를 무시하고 기습을 개시했다. 훗날 크리스마스 고지로 명명된 당시 중공군 주저항선의 핵심진지인 강원도 양구군 1090 고지를 한국군 7사단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중공군 204사단은 크리스마스로 우리측의 전투태세가 이완되어 있을 거라 여기고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이 고지는 돌산으로 참호를 파기 어려운데다 많은 병력을 주둔시킬 수 없어 방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 쌍방이 2㎞씩 후퇴해 설정하게 될 비무장지대(DMZ)를 고려하면 중공군도 한국군도 이 고지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51년 12월 25일, 1090고지에 중공군이 400여발의 포탄을 집중 발사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크리스마스 당일부터 28일까지 중공군 204사단과 한국군 7사단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이용해 고지를 포위하고 야간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우리 군은 일시적으로 수세에 몰렸으나 날이 밝자 이를 격퇴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겨울을 맞아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산은 한국군과 중공군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캐롤과 축복은 사라지고 총성과 포성, 신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고지의 주인도 계속 뒤바뀌었다.

공군 장병들이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호국영웅들을 기리고 있다. 공군 제공
4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한국군은 강력한 항공 및 포병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을 격퇴하고 고지를 지켰다. 사살 172명, 포로 5명 등의 전과를 거뒀으나 22명이 전사하고 21명이 실종됐으며 10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크리스마스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은 이듬해 2월 또다시 공세에 나섰으나 3일만에 패퇴했다. ‘크리스마스 고지’라는 이름은 얼핏 보면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6.25 당시 우리 군이 현재의 휴전선을 지키기 위해 이름 없는 고지에서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름 없는 호국영웅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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