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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에 자본주의 노출된 조선의 도자기 제조업… 준비안된 경쟁… 쇠락의 길

입력 : 2016-12-16 20:42:22 수정 : 2016-12-16 20: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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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숙 지음/역사비평사/1만8500원
시장으로 나간 조선백자/박은숙 지음/역사비평사/1만8500원


개항을 맞은 조선 사회의 변화는 컸다. 유교적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던 사회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시장과 마주했다. 개항 무렵까지도 관영 체제를 고수해오던 도자기 제조업도 민간으로 이양됐다. 정부의 재정위기 타개책의 하나로 진행된 일이었다.

수백년 동안 왕실에서 쓰이는 최고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해온 분원은 1883년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에 따라 운영권이 민간인인 공인에게로 넘어가고 ‘분원자기공소’라는 이름으로 운영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완전한 민영화는 아니었다. 사기장의 임금을 여전히 정부에서 지급하고, 판매 관리자인 공인들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관독상판’(官督商辦)의 체제로 운영됐다. 그러나 오래갈 체제는 아니었다. 정부가 돈을 제때에 지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갑오개혁에서 분원자기공소 체제도 혁파되었다.

대한제국이 세워진 1897년에 분원 자기업의 맥을 잇기 위해 번자회사가 설립되었다. 한때 좋은 수익률로 번창하기도 했으나 역시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유동자금 경색으로 운영난에 처했다. 게다가 조선 땅에 밀려드는 값싸고 화려한 수입 도자기와 일본인들의 요업 진출은 조선 도자업에 치명적 위기를 안겼다. 국권 강탈 후에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식산흥업의 일환으로 분원 자기업을 회생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시대 후반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분원은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하며 회생하려 했지만, 매번 자금난과 부채에 시달리며 결국 쇠락했다. 관영에서 민영으로 전환한 분원 자기업은 치열한 경쟁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든 셈이었다. 약탈적 자본주의 체제에 노출된 조선의 토착 산업이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분원 자기업은 여실히 보여준다.

책은 분원 자기업에 종사했던 하재 지규식의 ‘하재일기’를 통해 들여다본 분원과 도자기를 생산하고 판매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항 이후 분원 자기업이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맞닥뜨려 어떤 변화를 거쳐 쇠락해가는지, 또 최고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해낸 사기장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임노동자화되는지를 살펴본다.

강구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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