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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온다고 한다… 세상의 끝 날, 사랑은 ‘마지막 촛불’이다

입력 : 2016-12-01 20:54:59 수정 : 2016-12-01 20: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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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진 장편소설 ‘날짜 없음’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어둡다. 하늘에서 홍설(紅雪)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회색 눈으로 바뀌었다. 눈은 쉬지 않고 내려 지상은 온통 회색빛 천지다. 이상기후로 1년째 우중충한 하늘에서는 멈추지 않고 회색 눈이 쏟아진다.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은 회색빛에 뒤덮인 그 도시를 ‘회색시(市)’라고 명명했고 서로 ‘회색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잿빛 세계는 얼핏 보면 넘겨도 넘겨도 비슷한 시어로 채워진 실력 없는 시인이 쓴 첫 시집 같았다. 겨울이 아닌데도 겨울이 계속됐고 밤이 아님에도 밤이 줄곧 이어졌다. 비슷해진 낮과 밤의 농도로 그림자를 도둑맞은 사람들의 얼굴은 해골바가지가 되어갔다. 소설가 장은진(40)이 그려낸 디스토피아 ‘날짜 없음’(민음사)의 세상이다.

“하늘은 꽁꽁 얼어 버린 썩은 호수처럼 보이기도 했고, 빛이 새지 않도록 누군가가 하늘 전체를 시멘트로 발라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건 회색 눈이 아니라 하늘이 무겁다며 수제비처럼 뚝뚝 떼어 놓고 있는 구름 덩어리일까. 눈과 구름의 색깔이 꽨히 똑같은 건 아닐 것이다. 그도 아니면 죽은 사람들이 벗어 놓고 간 젖은 양말에서 떨어지고 있는 얼어붙은 땟국물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눈이 저토록 시커멀 수는 없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회색 세상을 그려낸 소설가 장은진. 그는 “미래를 축적하지 못한 채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절망을 억지 희망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음사 제공
장은진의 디스토피아는 위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냉정하게 상황을 기술하는 산문보다는 시적인 진술에 더 가깝다. 폭력과 피가 아무렇지도 않게 난무하는 여느 디스토피아와는 질감이 다르다. 장은진은 회색 눈에 갇힌 도시의 암울한 현실을 그리되 그곳에 남은 이들을 통해 절망을 영접한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은 남자와 여자. 검은 도시에서 유일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컨테이너 박스의 주인이 구두를 수선하는 남자이다. 이 남자와 육친처럼 지내는 ‘반’이라는 개, 그 개의 눈빛에 끌려 박스까지 왔던 여자 ‘해인’은 그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니 이 밤보다 더 밤 같은, 겨울보다 더 겨울 같은 암울한 곳에 사랑은 마지막 촛불처럼 겨우 켜져 있는 셈이다.

“멍자국 같은 얼룩덜룩한 구름들이 만들어 낸 어둠을 이불처럼 둘러쓰고 잠에 빠진 회색시는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수면병 걸린 환자의 모습이었다. 하늘은 늘 그늘이어서 회색시는 불면의 고통을 조금도 모르는,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그늘의 도시이자, 얼룩의 도시이자, 잠의 도시였다. 그러나 도시를 잠에 빠뜨린 그 하늘은 다크서클을 달고 사는 불면증 환자처럼 늘 깨어 눈 만드는 일을 했다.”

소설은 처음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며 “그게 온다”고 발설한다. 그게 온다는 말은 계속해서 반복되거니와 맨 마지막 문장도 “그게 온다고 한다”로 맺는다. 그것이란, 최종 재앙을 불러올, 숨통을 마지막으로 끊을 거대한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이러한 소식이 소문으로 전파돼 회색 도시를 탈출하려는 ‘회색인’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다. 남자와 여자를 포함한 몇몇만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고 검은 무덤 같은 도시를 배회한다. 기타를 수리하던 청년은 회색인에서 탈출해 돌아와 그가 목격한 공포를 눈빛으로만 증언하다 죽는다. 여기저기 자살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발에 걸리는 게 시체들이다. 재활용할 사람도 없는데 폐지 줍는 노파는 여전히 회색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게 오고 안 오고는 노파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닌 듯했다. 관심사라면 오로지 하루를 지탱해 나가는 데 있는 것 같았다. 허무하디허무한 게 삶이라지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살고 버텨야 한다. 딱 한 번뿐인 게 그거니까. 아니, 허무하지 않다. 누군가를 애달프도록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눈을 감는다면 어찌 허무하달 수 있을까. 짊어지고 갈 수 없는 물질은 무상해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붙들고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노파를 관찰하는 작가의 이런 진술은 이 소설이 겨우 내보이는 희미한 희망이다. 세상이 아무리 출구 없는 암울한 회색 세상이라도 끝까지 허물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건 마음이라는 언설. 세상의 마지막을 앞두고 회색 도시의 두 남녀는 꼭 껴안고 ‘낮고 가느다란 숨’을 서로 나누며 눈을 감는다. 장은진은 “대개의 종말을 다루는 소설들이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희망을 말하지만 희망 없이 절망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면서 “결말부에서 독자들이 희망을 읽는다면 작가인 저로서는 절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날짜가 없는 것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춘들의 현실은 마지막 남은 하루도 어제와 같은 특별하지 않는 오늘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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