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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준비 없인 미완·실수의 연속… 올바른 선택의 힘 보여줘야

입력 : 2016-11-18 20:59:43 수정 : 2016-11-18 20: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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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신중한 선택 위한 주도면밀한 준비
한 임금이 재위한 동안의 사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것을 실록(實錄)이라 한다. 실록은 왕이 승하한 뒤, 실록청을 두고 시정기(時政記)를 거두어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시정기란 임금이 정무를 집행할 때에 그와 관련된 내용 가운데 역사에 남을 만한 자료를 사관(史官)이 추려 적은 기록을 말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에서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은 실록(實錄)이라 하지 않고, 일기(日記)라는 명칭을 붙인다. 대개 왕이 죽으면 그 당시의 기록을 모아 실록을 편찬하고, 편찬을 맡은 임시관청을 ‘실록청’이라 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왕위 이양이 아니라 폐위당한 왕의 기록은 특별히 ‘일기’(日記)라 하고, 편찬을 담당하던 관청을 ‘일기청’이라 했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에는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등 세 편의 일기가 있는데, 그때마다 일기 편찬을 위해 임시로 일기청을 설치했다. 정상적인 왕위 이양이 아니라 폐위에 의한 이양이었기 때문에 실록청이라 부르지 않고 일기청으로 불렀다. 만약 지금도 왕조시대라면 현 대통령의 업적 기록은 어디서 편찬하며 어떤 이름으로 불릴까.


‘연산군일기’ 7년(1501) 5월 6일 첫 조목(條目)에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왕에게 아뢰는 내용이 나온다.

“옛말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습니다. 백성이란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령한 존재이니, 백성의 원망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사온데, 백성의 원망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古云 民惟邦本 本固邦寧. 小民至愚而神 民怨不可不愼. 民之怨咨 未有甚於此時)

위의 내용은 군인들에게 급료를 주지 않고 토목 일을 맡긴 것과 일에 완급을 주지 않고 혹독하게 일을 시킴에서 터져 나오는 백성의 원성을 주청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것과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대목은 지금과도 딱 들어맞는 내용이다. 또 하나, 왕은 언제나 백성의 원망의 목소리에 조심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연산군 일기 7년 5월 6일 첫 조목.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목소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금주의 가장 큰 목소리는 단연 ‘박근혜는 하야하라’와 ‘박근혜는 퇴진하라’였다. ‘대통령 방 빼’ ‘박근혜는 손떼’ ‘국민이 주인이다’ ‘이게 나라입니까’와 같은 준엄한 원성이 전국 곳곳에서 파도처럼 몰아쳤다. 본인이 늘 주장하던 신의가 일순간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공자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하였다. 신의가 없으면 정치든 개인이든 일어설 수 없다는 뜻이다.

국가적 신뢰 상실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세대와 성별, 이념을 초월하여 지금도 경향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끓고 있다. 목소리로도 부족하여 한 손에는 촛불을 또 한 손에는 구호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소리는 귀로 듣고, 불빛은 눈으로 보았을 터인데도 박근혜 대통령의 벽창우 같은 고집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순자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물은 배를 엎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고 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자릿수라면 너무나 가벼운 배이다.


무신불립. 신의가 없으면 정치든 사람이든 일어설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가 지녀야 할 세 가지 경계’(君子有三戒)를 일러 주고 있다.

“젊어서는 혈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여색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에는 혈기가 강하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약하므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强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

여담 같지만, 인생을 ‘BCD’로 풀이하는 우스개가 있다. B는 Birth(탄생), C는 Choice(선택), D는 Death(죽음)의 약자로 인간은 태어나서 ‘선택’만 하다가 죽는다는 얘기인데, 이 말은 삶에서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는 개그라 할 수 있다. 선택이 중요하다면 신중한 선택이 요구된다. 만약 그 선택이 나랏일을 맡은 이의 선택이라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기도하는 자세로 널리 자문하여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소통의 대통령 몫이다.

민주주의에서 선택(選擇)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이다. 대선, 총선의 ‘선거(選擧)’는 물론이고, 정유라의 경우처럼 국가 대표선수나 대학 입학생 ‘선발(選拔)’ 또한 공정을 잃어버리면 나라의 기강까지 흔들린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았다. ‘고를 선(選)’ 자는 ‘제물(巳)을 많이 선택해 놓고 제사 지내러 갈(?) 사람을 여럿이서 함께(共) 뽑는다’는 의미이다. 선(選)은 선(善)한 결과를 위해 업무 경계의 선(線)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


수즉재주 수즉복주
최선의 신중한 선택은 임기응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한 준비’가 요구된다. 준비 없이 당선만을 목적으로 인기몰이를 해오다가 막상 국정을 맡게 되면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대통령 임기 5년은 인턴십 기간으로 미완과 실수의 연속이었다. 정치가도 국민도 모두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이라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준비(準備)라고 할 때의 ‘수평 준(準)’은 ‘물 수(?)’와 ‘새매 준(?)’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그러니까 물은 땅의 수평을, 새매는 하늘의 수평을 뜻하므로 준(準)은 절대적인 ‘수평’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보면 준(準) 자는 ‘사회 복지’의 방향과 ‘기회 균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갖출 비(備)’ 자는 사람이 화살집을 허리에 차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항상 먹을거리를 장만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 오늘날로 치면 ‘일자리 창출’이나 ‘식량 공급’이 최우선의 준비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러니까 ‘준비’라는 말 속에는 위로는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으로부터 군·관·민·당·청 모두가 수평적 복지와 일자리 창출에 대하여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시작된 국정 공백과 국가 혼란 및 민심 동요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혼란을 절대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서는 전 국민이 심각한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국민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빈틈없는 준비 없이는 신중한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잘된 준비와 올바른 선택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나는·지금·여기서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물음이 아니라 감동으로 다가와야 한다. 작게는 나 자신을 위해, 크게는 훌륭한 대통령을 모시기 위해 언제나 근골이 아우성칠 정도로 준비된 국민이어야 한다. 다음 선거를 위해 준비된 사람만이 웃으며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수준은 국민 수준 이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불통은 준비되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

지인의 주장을 빌려 준비된 글을 마친다. ‘봄날은 간다’가 아니라 “봄날은 온다”

권상호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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