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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투항하고 때론 맞서며 일군 대중문화

입력 : 2016-11-05 03:00:00 수정 : 2016-11-04 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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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수많은 반공영화 쏟아진 까닭은 ‘당근·채찍 전략’으로 권력에 순응하게 만들어 / ‘대중의 탄생’ 동학혁명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한국 대중문화 100년 형성·발전 과정 다뤄
강헌 지음/이봄/1만5000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자유만세-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 1·2/강헌 지음/이봄/1만5000원


지난달 18일, 문화계 인사 100여명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리스트를 작성한 책임자의 처벌도 주장했다. 정부는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했지만 그간 심증으로만 존재했던 검열 사례는 더 드러나게 될 것이란 문화계의 의심을 떨쳐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리스트에 포함됐다는 한 시인의 말.

“문학의 본질은 비판이다. 정권이 비판을 못하게 막는 행위는 군사정권보다 더 어둠의 시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의 산업적 속성을 활용하는 검열을 제도화했다. ‘우수 영화 추천제도’가 그중 하나였는데 ‘돌아오지 않는 해병’(가운데), ‘빨간 마후라’(아래)는 이 제도의 산물 중 하나였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 중의 한 장면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입맛에 따라 예술과 문화를 통제하려는 권력에 대항해야 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의 통치기는 어떤 시대였을까.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의 정체성을 그가 규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책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1979년 10월 26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18년을 통치한 박정희의 집권기에 오늘날 우리의 유전자에 깊이 각인된 그 무엇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대중문화와 관련해서는 “대중문화가 어떤 내부적 법칙으로 완성되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기”라고 규정한다.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만큼 문화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언급한 사람은 그 이전이나 이후에나 별로 없다”고 한 것은 흥미롭다.

이 시절의 문화를 떠올릴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역시 검열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검열의 방침,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검열 방침을 그대로 계승한 미군정기의 검열 기조는 계승되었다. 검열은 “예술 생산 집단이 체제 저항적인 담론을 예술의 이름으로, 예술로 포장해서 만들어내고… 확대재생산되는 것을 저지하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독재자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진일보한(?) 전략을 구사한다. 사전검열에다가 “대중문화가 기본적으로 흥행 산업이라는 약점을 교묘히 활용한 것”이다.

‘우수 영화 추천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우수 영화에 선정되면 외화 수입의 쿼터를 늘려주는 제도였다. 당시 흥행 영화의 대부분이 할리우드 영화였다는 점에서 수입 쿼터는 곧 엄청난 규모의 돈을 의미했다. 영화 제작자 입장에서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보다 할리우드 영화를 한 편이라도 더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데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우수 영화 선정의 주체인 권력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 것, 즉 ‘그분이 사랑할 만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채찍은 채찍대로 휘두르고, 살살 당근을 주면서 ‘알아서 기게’ 만드는 제도가 창안된 것이다.

1960년대 미친 듯이 반공영화가 쏟아져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흥행이 될 가능성은 적었지만, 어디나 예외는 있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1963년에 개봉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인 25만 개봉관 관객을 모았다. 다음해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기록을 깼다.

책은 “박정희 정권은 이전 시대에 이루어진 단순한 검열이나 콘텐츠의 통제를 통해 대중문화의 방향과 본질을 규정하는 데서 훨씬 진일보한 방식으로, 즉 산업적인 측면까지 정교하게 계산해서 대중문화 종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방식을 제도화했고, 대중문화의 근본 질서를 자신의 의도대로 잡아갔다”고 분석한다.

역사적 맥락의 바탕 위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형성, 발전 과정을 더듬는 책이다. 궁극적으로 대중문화에 시선이 쏠리지만, 문화와 역사를 한 몸으로 보는 시각을 전제하기 때문에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전체 4권으로 기획을 했고, 이번에 나온 1, 2권은 120여 년 전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해 박정희 정권까지를 다룬다. 정치·사회적인 맥락에서 주로 해석되었던 동학을 1권의 시작으로 잡은 것은 동학의 봉기가 봉건의 시대에서 대중의 시대로 전이되는 첫 순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에 존재를 드러낸 대중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그것에 가장 절실한 무언가를 투영했다고 책은 말한다. 2권은 1945∼1975년은 대중문화에 대한 권력의 억압이 두드러졌다. 대중문화는 때로 투항하고, 때로는 대항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갔다. 박정희 정권에 대항한 자발적인 대학가 청년문화를 한국 대중문화사의 드라마틱한 백미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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