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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더러운 전쟁 벌였다” 일제 육군의 민낯

입력 : 2016-08-13 03:00:00 수정 : 2016-08-12 18: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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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마사야스 지음/정선태 옮김/글항아리/5만4000원
쇼와 육군/호사카 마사야스 지음/정선태 옮김/글항아리/5만4000원


야스쿠니 신사에 가면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군마, 군견을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그럴듯하게 만들어 보기에 제법 의젓하다. 피해국, 피해자의 상처에는 눈감아도 전쟁통에 죽은 짐승은 추모하겠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전쟁은 그때나 지금이나 ‘황군(皇軍)의 성전(聖戰)’이다.

“너무나 더러운 전쟁이었다.”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 4000여 명을 취재해 150여 권의 책을 저술한 저자가 책에서 전하는 참전 군인들의 증언이다. 성전 운운한 전쟁의 실상은 그랬던 것이다. 책은 일본군의 주력으로 전쟁을 이끌었던 쇼와(전쟁 당시 일본 연호) 육군의 실체를 파헤침으로써 참혹함을 고발한다. 

1946년 도쿄전범재판 법정에서 일본 A급 전범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총리, 육군상 등을 지내며 태평양전쟁을 이끌었던 도조 히데키(앞줄 왼쪽)는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물으려는 연합국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골몰했다.
글항아리 제공
#“일본 병사는 누구든 인간이 아니었다”


1956년 중국 법정에 선 일본군 8명. 기소장, 판결문에 적시된 이들의 범죄사실은 처참하다.

“1942년 10월 피고인(스즈키 히라쿠 전 중장)은 휘하의 부대를 동원해 중국인 1280여 명을 참살했다. 많은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고 19명의 영아를 내동댕이쳐 죽였다.”

육군은 조직적으로 만행을 저질렀고, 그 속의 병사들은 누구도 인간이 아니었다. ‘살인의 프로’, ‘도둑질의 프로’, ‘방화의 프로’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런 행동을 제지할 규율은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군사 지도자들이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간을 철학적, 윤리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았던 이들은 인간을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한 참전군인의 판단은 좀 더 구체적이다.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무엇인지 보여줘야 했다.”

#‘도조의 전쟁’

1941년 12월 8일∼1945년 8월 15일 3년 8개월간의 전쟁 동안 도조 히데키는 2년 8개월에 걸쳐 총리, 육군상 그리고 때로 내무상, 문부상까지 겸임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한때는 참모총장으로 군사 대권까지 장악했다. ‘도조의 전쟁’이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돼 사형된 도조는 ‘황군’을 자칭했던 일본 육군의 일왕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다.

도쿄전범재판 검사단 일원 중 일부 국가는 일왕도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성상 폐하에게 (전쟁) 책임을 돌리려는 데 대해서는 전력을 다한다”라는 원칙 아래 재판을 받았다. 일왕에 대한 평소의 태도는 지극정성이었다. “폐하는 신과 같은 무사(無私)의 존재”, “군인은 하루 24시간 모두 천황의 명을 받들고 있다. 식사를 하는 것도 그 덕분이다”고 말했다. 40년간 육군 조직에서 살아온 그에게 일왕을 “경모하는 염은 골수까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애초 도조는 일왕에게 군부 내 강경파를 제어할 카드였다. 그러나 1948년 11월 도조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왕은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인간 폭탄

1944년 10월 25일, 필리핀의 다바오 기지를 출발한 해군특공대 소속 비행대가 미 해군 항공모함을 목표로 고도 3500m에서 수직으로 하강했다. 인간 폭탄 ‘가미카제’의 첫 작전이었다. 가미카제 작전을 처음 생각한 건 육군이었고 도조가 참모총장을 겸임한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책은 작전에 실제 투입되었던 군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우에하라 료지, 1943년 11월 입대했고 1945년 5월 오키나와에서 ‘육군특별공격대원’이 되어 22살에 전사했다. 죽기 전 우에하라가 남긴 수기를 통해 가미카제 대원들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우에하라는 “이런 작전을 행하는 국가가 전쟁에서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조직이 오래 지속될 리는 없다”고 썼다.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지휘관들은 자신들도 뒤를 잇겠다고 격려하고 다짐했으나 헛소리일 뿐이었고, 전후에도 여유있게 살았다. 저자는 “쇼와 육군은 1944년 무렵부터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다. 특공 작전은 그러한 상황에서 태어난 이상한 작전이었다”며 “특공기 조종사들은 이러한 폐해의 희생자였다”고 강조한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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