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우연히 케이블방송에서 1970년대 중반에 무척 화제가 되었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보았다. 예전 기억을 되살리며 재미있게 보았는데, 영화의 배경으로 나오는 신촌 주변과 서울의 여러 장소들은 특히 흥미로웠다. 그때의 풍경을 보니 그동안 서울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많이 변한 도시의 풍경만큼이나 놀라웠던 것은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그 당시 서울 사람들의 말투였다. 영화에는 대학생들과 중산층의 서울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쓰는 서울말의 억양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보다 조금 퉁명하고 강한 느낌이었는데, 심지어 북한 말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봐야 40여 년 전인데… 하며 지난 시절의 한국 영화를 몇 편 더 봤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런 경향이 훨씬 더 심했다. 우리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의 말투와 억양이 부드럽게 변한 것이었다.
![]() |
‘심수정’은 월성 손씨와 더불어 양동마을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축인 여강 이씨 집안의 정자로 ‘서백당’, ‘향단’ 등과 더불어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
더욱 놀라운 것은 외국어인 일본어의 억양이 요즘은 우리의 귀에 크게 설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본어를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억양이 무척 비슷해서 언뜻 알아들을 것만 같다는 착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마 일본과 교류하며 서로의 문화가 섞이다 보니 그런 현상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문화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자라고 성장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또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여러 개의 문화가 부딪치기도 하지만 서로 섞이고 서로 동화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의 문화권이 여러 개로 분화되기도 하지만, 여러 개의 문화가 하나로 합쳐지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지키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사실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의문이 들기는 한다. 과연 완벽한 자아의 본질이란 있는 것일까. 우리는 늘 영향을 받고 만들어지고 변화되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존재론적인 성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문화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면, 특히 건축을 하는 입장에서 우리의 건축이란 무엇이고 그 정체성과 성격은 어떠한가에 대한 고민이 깊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한때는 한국적인 것에 대해 정적인 것으로 보기도 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였을 수도 있고, 혹은 백자나 청자 같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나 한복의 곡선으로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그것 역시 무척 정적이다.
또는 백의민족을 들고 나와 흰색과 한(恨) 등으로 정의 내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나의 틀을 만들고 그 틀로 우리 문화의 특성을 해석하려고 하면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는 무척 동적이다. 동적인 정도가 아니라 입체적이며 다차원적이다.
![]() |
삼관헌이라는 현판은 세 가지를 본다는 의미인데, 마루에 달린 세 개의 바라지 문을 열면 문 하나에 회화나무가 한 그루씩 담긴다. |
경복궁 앞 예전 중앙청으로 쓰던 건물에 국립박물관이 있던 시절에 그곳에 자주 갔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박물관이라는 곳은 늘 한적하고 쾌적하다. 그래서 나는 그 한적함을 즐기고자 오래된 유물에 별다른 관심도 없으면서 그곳에 자주 갔었다. 사전 지식이나 교양이 부족해서 그냥 설렁설렁 구경하는 게 다였지만 그 공간에 있는 것이 무척 편했다. 그때 단원도 보고 추사도 보았다. 더불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귀한 보물들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지만 도깨비가 무식하면 부적이 통하지 않는다고 그 보물들과 나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획전시를 하나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도자기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시대 순으로 개괄하자는 취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초기 도기가 처음으로 나올 때부터 시작해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 순으로 전시되어 나 같은 초심자가 보며 이해하기 딱 좋은 전시였다. 자기는 투박하고 원시적인 그릇에서 시작하여, 화려함과 기교의 정점에 이르는 고려자기까지 아주 순탄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통시적인 안목으로 관람하게 되니 예전에 그냥 청자만 보고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문양의 정교함과 화려함, 그리고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청자의 독특한 비색에 탄복하며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극성기의 청자 다음에 나온 자기는 좀 이상했다. 일단 형태가 둔해지고 색이 탁해지고 문양은 아주 어설펐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무척 궁금했고, 그렇게 1세기가 흐르자 우리가 잘 아는 분청사기의 시대가 열렸다. 추상적인 문양과 단순해진 형태, 그리고 묘하게 탁해진 자기의 색은 현대적인 감각이었으며 아주 뛰어난 추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후 다시 백년이 흐르자 백자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청자를 만들던 도공들이 모두 증발해버린 것일까. 물론 그 당시는 고려 말이므로 이런저런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청자로 예술의 끝까지 간 사람들의 다음 선택은 실험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형태, 새로운 색, 새로운 문양의 실험, 그런 실험이 한 세기 지속되며 세계 도예 사상 유례가 없는 분청사기라는 독특한 도자기가 만들어지고, 그런 추상성의 마지막은 조선 백자로 이어진다.
추상성은 건축이나 다른 조형 예술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석탑이 대표적이다. 한국에 석탑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백제 무왕 때이다. 그때 익산 미륵사를 만들며 가운데 9층 목탑을 만들고 양 옆으로 화강석을 자르고 다듬어서 쌓아올린 석탑을 만들었는데, 그 석탑은 목조 건축을 석조로 번안한 것이다.
탑신에 기둥 모양을 만들고 문 자리를 만들고 그리고 지붕을 올린다. 그런데 목조건축의 지붕에는 지붕의 하중을 받아 기둥으로 옮겨주는 부재인 공포가 짜이는데, 그 공포를 네 단의 계단식 층굽받침으로 추상화한다. 그리고 그런 석탑의 표현은 이후 나오는 석탑의 전형이 되고 독특한 양식으로 수백 년 발전을 거듭한다.
그런 추상성은 때론 해학과 생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의 다양한 민화들과 조선의 목공예를 보면 방금 어느 공방에서 바로 나온 현대 작가의 공예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또한 왕이 사는 궁궐 정전 마당에 깔린 약간은 울퉁불퉁하고 성글게 마감한 박석이나 서수들의 표정을 보면, 근엄함이나 진지함보다는 해학과 생략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만의 독특한 미감을 볼 수 있다.
그런 정신은 집을 앉히는 배치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연의 흐름대로 집을 앉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상식 같은 것인데 그런 생각이 엄정함이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는 궁궐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좀 특별하다. 가령 창덕궁이나 지금은 볼 수 없는 고려의 정궁인 개성의 만월대를 보아도 땅의 흐름대로 유연하게 궁을 앉힌 모습은 같은 문화권의 중국이나 일본과 무척 다르다.
가끔 그것을 측량이나 기술의 미흡 때문이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자연의 흐름을 기의 흐름으로 인식하고 기가 흘러 다니는 역동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 우리 건축의 중요한 목표였다.
#한국의 건축, 움직이는 집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건축은 비유하자면 3차원을 찍는 동영상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본이나 중국의 건축은 사진으로 찍기 좋은 이를테면, ‘픽처레스크’한 건축이다. 모든 풍경과 호흡과 빛이 일시에 정지된 것처럼 혹은 냉동된 것처럼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의 장면에 집중한다.
그런데 우리의 건축은 어떤 한 지점에서의 장면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이 있어서, 사진으로는 잡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더 있다. 움직임이 수반되는 우리의 미학은 가령 여러 채로 이루어진 집을 생각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심수정은 양동마을에 있는 집이다. 집이라기보다는 정자이며 가문의 서당 역할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1560년에 지어졌지만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17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했으니, 다시 지어진 지도 올해로 99년이 되었다.
이 집은 월성 손씨와 더불어 양동마을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축인 여강 이씨 집안의 정자로, 서백당, 향단 등과 더불어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경사지에 편안하게 앉혀 놓은 집의 배치도 좋고 좋은 재목을 다듬어 집을 만든 솜씨도 대단하다.
말이 필요 없다. 결이 좋은 그 집 기둥이나 마루를 손으로 쓸어보면 알 수 있다. 집이 하고 싶은 말이 손을 통해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고 어머니의 손을 잡은 것처럼 안온해진다.
내가 그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점 말고도 또 있다. 양동마을을 관통하는 주도로를 조금 따라 마을로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져 심수정으로 올라갈 때면, 축대 위 담장과 그 옆으로 일자로 심긴 네 그루의 오래된 회화나무가 만드는 풍경이 보인다. 오래된 담장과 나무가 있는 풍경이야 우리나라 구석구석 오래된 집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풍경이겠지만 이 집은 조금 특이하다. 자세히 보면 나무 네 그루가 일렬로 정연하게 서있는데, 세 그루는 담장 안에 있고 한 그루는 담장 밖으로 나가 축대 끝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활발하게 앞으로 내달리고 있다.
나무의 수령은 대충 봐도 200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처음 갔을 때 그 풍경이 너무 재미있어서 집을 보기도 전에 그 나무 아래에서 한참 올려다보았다. 나무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무와 차분하게 앉아있는 집이 만드는 역동적인 풍경에 매료된 것이다. 한 그루는 담을 훌쩍 넘어 마을로 뛰어나가는 것 같았고 세 그루는 집안에서 나가는 나무를 심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이 집이 처음 지어진 지 450년이 되었으니 나무는 집이 지어지고 나서 심어진 것 같고, 불에 탄 것을 다시 세운 것이 100여년쯤 되니 나무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다.
집을 지은 뒤 나무를 심었거나 나중에 담을 새로 쌓을 때 나무를 적당히 피해 심었거나 지금의 구도로 만든 것은 집을 지은 이의 어떤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자연의 질서와 집을 감싸 안으며 둥그렇게 감아 도는 담장이 만드는 인간의 질서가 서로 공존하는 풍경이었다.
두 개의 질서는 서로 다른 방향과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지만 적당히 비켜주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개의 현판이 달려있다. 심수정이라는 현판과 함허정, 이양재, 삼관헌이라는 현판…. 모두 합해서 네 개다. 그중 삼관헌이라는 현판은 세 가지를 본다는 의미인데, 마루에 달린 세 개의 바라지 문을 열면 문 하나에 회화나무가 한 그루씩 담긴다.
심수정은 몇 칸 되지 않는 작고 고요한 집이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미와 자연과 건축이 어우러지고 서로 교차되며 입체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의 건축은 그런 역동성을 기반으로 하는 움직이는 건축이다. 그런 기운이 한국 건축의 아주 중요한 바탕인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