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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간군상 깎고 다듬으며… 시대의 초상을 담는다”

관련이슈 편완식이 만난 사람

입력 : 2016-06-03 01:30:00 수정 : 2016-06-02 22: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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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인간’을 조각하는 라선영 작가 30㎝ 남짓한 인간 목각 군상들이 널브러져 있다. 인형놀이를 위해 모아놓은 장난감 같다. 색으로 분장을 하기도 했다.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는 조각가 라선영(29)의 평창동 작업실 풍경이다. 무겁고 거대할 것이란 통념을 깨버리는 공간이다. 한 디자이너를 떠올리게 해줬다.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촉발시켰던 이탈리아의 거장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사람이 최고”라고 했다. 멘디니는 일찍부터 자신의 디자인에 인격성을 부여해서 디자인이 단지 무생물적 도구가 아니라 생명체와 같은 존재로 다가가게 했다. 라선영의 목조각이 그렇다.

“사람들을 웃기기도 울릴 수도 있는 엄청남 힘은 바로 사람의 형상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멘디니는 사람의 이름을 딴 ‘안나G’라는 와인 오프너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인간형상을 한 디자인으로 인격성을 부여해 지금까지 롱런을 하고 있다.

인체조각을 통해 이 시대 욕망의 초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라선영 작가. 그는 인형을 시대의 염원, 욕망, 두려움 등을 반영하는 도구로 해석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인형은 고대 이집트 무덤에서 발견되었어요. 기원전 2000년쯤 어린아이의 묘에서 당시 복장을 한 목각 인형이 함께 출토되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어요. 선사시대부터 존재한 인형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건인 것이지요. 저의 목조각도 그런 관점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인형이 어린아이 때부터 성장기의 친구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한다. 인형은 풍작을 기원하거나 역병을 떠맡는 제례 기능을 하며 세계 각지에서 그 지역의 문화를 담았다.

“인형들이 인간 목조각을 통해 이 시대의 문화 등 시대의 초상을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어요.”

그가 나무라는 재료를 택한 것은 돌과 더불어 인간이 가장 먼저 사용한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만들기의 본능을 깨어주는 재료라는 얘기다.

욕망의 화신으로 표현한 신데렐라 신부.
“우리는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집을 짓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가구도 만들고 옷도 지어 입었지요.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무엇을 만들까?’라는 고민은 사라졌지요. 대신 ‘무엇을 살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지요.”

그는 미술대학시절에도 만들기 본능을 충족할 수 없었다. 컴퓨터 등 첨단 도구들이 손을 자꾸만 묶었다. 여성 작가지만 그가 지금도 나무를 직접 손으로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이유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삶을 구성하려고 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만들기 본능이지요.”

그의 조각은 작다. 그러기에 무릎을 꿇고 바라봐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인간을,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멘디니의 작은 성당이나 보석기둥을 연상시킨다. 전시장에서 작은 것들이 숭고하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그 속을 거닐다 보면 삶의 깊은 내면까지 살펴보게 된다.

욕망의 마천루를 향해 기어오르는 가당찮은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 영혼의 평온함까지 느끼게 되지요. 영적인 세계를 만나는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기능성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오브제들을 많이 디자인한 멘디니의 의도를 가슴속으로 이해하게 됐다.

“크기에 대한 과장과 축소,다시 말해 때로는 아주 크거나 아주 작게 만들어 생소한 느낌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일반적인 사물과 인간을 소품이나 기념비적 조각품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고 한다. 명상적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어른들을 위한 인형을 만드는 것일 게다. 목각인형에는 태어나서 자란 서울 사람들의 모습이 많다. 다섯 개의 학원가방을 들고 있는 엄마와 초등학생,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군상들, 깃발 든 관광가이드, 야구루트 아줌마와 철가방 아저씨, 예수 천국 피켓과 스님, 미국인 관광객, 택배기사 등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기어오르는 우리의 자화상도 보인다. 유학생활을 했던 런던 사람들의 모습도 있다.

“사회적 지위나 개인적 성향과 상관없이 같은 크기로 70억 개의 목각인형을 만드는 것이 목표예요. 70억 지구인이 살아가는 70억 개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조각에서 인간의 육체는 특별한 주제다. 조각가는 인체를 삼차원적 형체로 인식하여 하나의 물체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한다. 인체 조각은 동시대 인간들이 공유하는 인간에 대한 정서나 직감을 형상화하게 마련이다. 그 사회의 미감을 드러낸다. 그 유명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은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기묘한 신체 비례를 갖지만, 당시 미감에서 보면 과장된 엉덩이와 풍만한 가슴을 가진 이상적 여성의 신체 비례를 재현했다. 구석기인들이 11㎝ 남짓한 조각상으로 풍요와 출산의 여성상을 남겼던 것이다.

“저는 관람객이 작품을 내려다보고 들여다보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관람객이 신처럼 전지적 관점으로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작품 배치도 역할놀이하듯 해 관람객이 인간을 염탐하고 통제하는 듯 느끼게 유도하지요.”

그는 23일부터 7월 22일까지 열리는 카이스갤러리 초대전에선 바비인형 같은 신데렐라 신부 모습의 작품을 선보인다. 욕망의 화신이다. 바비인형에 대해선 두 가지 평가가 있다. 용기와 자신감, 능력으로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성장기 소녀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섹시한 몸매를 강조, 외모 중심의 잘못된 여성관을 심거나 눈 크고 늘씬한 서구적인 외향만 미인이라는 왜곡된 미의식을 조장한다는 부정적 평가도 받고 있다

“저는 인형을 시대의 염원, 욕망, 두려움 등을 반영하는 도구로 생각해요. 오늘날의 인형은 ‘인형 같은’ 결함 없는 도시적 외모와 영원한 젊음, 완벽한 생활의 모델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형들은 주로 캐스팅을 통해 복제로 생산되고 있지요.”

그는 나무로 만든 신데렐라 신부를 틀로 삼아 600개의 도자기 인형도 만들었다. 전시장에서 공산품으로 팔 예정이다. 포장은 양파 망에 담아주는 것으로 정했다.

“도자기를 선택한 것은 욕망은 깨어지기 쉽고 발길에 차이도록 흔한 것으로 변모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어서지요.”

사람들의 구매 행위로 하얗게 반짝이는 도자기 신부들은 이빨 빠지듯 사라지게 된다. 남는 것은 틀이 돼준 목조각뿐이다. 본질만 남게 되는 것이다. 퍼포먼스식 전시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분명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똑같은 600개의 도자인형임에도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르려 들 겁니다. 양파껍질처럼 중첩된 얄팍한 욕망은 아무리 벗겨내도 알맹이 없이 끝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인체 조각으로 인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 가는 조각가 라선영은 이화여대에서 조소과를 종업하고 영국(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했다. 서울과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예술가는 상상력의 성직자’라는 말을 새기며 오늘도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조각한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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