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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울리고… 노시인의 익살스런 ‘고해성사’

입력 : 2016-04-07 21:05:56 수정 : 2016-04-07 21: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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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 낸 시인 정양 “아내가 이번 시집을 읽고 나서 웃니라고 눈물이 다 나왔다고 해, 반찬도 좋아지고…. ‘이 세상에서 제일 곱고 착한 사랑하는 아내에게’라고 처음으로 사인해서 주었는데 거기에 반했나봐.”

정양(74) 시인이 7번째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를 내고 서울에서 가진 기자간담회 뒷자리에서 우스개처럼 던진 말이다. 대체 어떤 시가 노경의 아내를 그리 눈물 나도록 웃게 만들었는지 물었더니 ‘그건 세 글자다’라고 했다. 그 시는 신문에서 중계하기에 다소 쑥스럽지만 비슷한 질감의 ‘We have to’ 한 대목은 이렇게 흘러간다.

“중간고사 끝난 다음 주 노총각 영어선생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용출이를 불러내더니/ 답안지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꾹꾹 찍으면서/ 시험이 장난이냐 이 쌍녀르 새끼야/ (...)/ 해브 투로 짧은글 짓는 문제에/ 우이 해브 투 핸드플레이라고 썼더니 저런다고/ 눈물을 훔치며 용출이는 더 크게 울었다”

정양 시인은 “어이없고 황당한 역주행의 시절이 어서 마감되기를, 그리고 의로운 호걸들이 양산박에 깃들었듯 우리 모악에도 강호제현의 따뜻한 마음들이 다투어 모여들기를 빈다”고 자서에 썼다.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시인의 단면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시편이다. 우석대 교수로 정년퇴직한 정양 시인은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상징적인 시인이다. 이른바 ‘문단 정치’와는 담을 쌓고 강호에 은거해 중당 문단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작가회의 젊은 후배들이 주는 ‘아름다운작가상’ 1회 수상자이고 ‘백석문학상’도 받았다. 이번 시집에서는 위에 언급한 시편들처럼 헛헛한 웃음을 놓지 않으면서도 시대와 역사에 대한 진중한 성찰과 반성으로 중심을 잡는다.

“눈 감으러 이발소에 오는 것 같다/ 목을 치기 전에 머리빡을 이렇게/ 몇 차례나 시원하게 박박 감겨주는/ 착하고 솜씨 좋은 망나니는 없었을까/ 오랏줄에 묶인 채 눈 감긴 채/ 원통한 목이 뎅겅 잘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 부릅뜨고 싶었을 머리통들이/ 여기저기 피범벅으로 뒹구는 게 보인다/ 박박 감아주는 손길에 머리통을 맡기고/ 눈 부릅뜨지 못한 일들을 눈 감은 채 헤아린다”(‘눈 감은 채’)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를 묻자 정양 시인은 이 시편을 거론했다. 그는 “이 세상, 눈을 부릅떠야 할 일이 많은데 눈을 감고 지나온 적이 없는지 반성과 다짐을 하면서 헛디디고 헛짚을지라도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오기”라고 말했다. 그가 절필을 선언한 옆자리 안도현 시인을 지목하며 “시를 그만 써도 될 만한 사람의 시집은 내면서 정작 시를 써야 될 사람은 안 쓰고 있다”고 덧붙이자, 안도현은 “안 쓰는 대신 시집을 만든다”고 답했다.

이 시집은 ‘모악’ 출판사의 첫 책으로 나왔다. 전북 지역 문인 김용택 이병천 안도현 유강희 등 20명이 1억원을 출자해 ‘문학의 다양성’과 ‘출판의 지속성’을 실현하기 위해 올 1월 설립한 출판사가 ‘모악’이다. 소설가 겸 시인이자 ‘살림’ 등에서 오래 편집자로 일했던 김완준을 대표로 초빙했다. 문인들이 출자해 그것도 지역에서 출판사를 꾸린 경우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정양 시집은 문태준 손택수 박성우 시인이 기획위원을 맡은 ‘모악시인선’ 시리즈 첫 책이다. 시집 외에도 문학 전반에 충실하면서도 청소년들을 위한 책과 문학 저변을 다지는 인문학 책도 꾸준히 펴낼 예정이다. 엄경희 구모룡 유성호 권혁웅 정끝별 등 5인의 시작법 시리즈가 준비돼 있고 내년에는 송찬호 시인의 어른을 위한 동화도 출간할 계획이다.

문인들이 출자해 전북 전주에서 출범한 출판사 ‘모악’에서 첫 시집을 펴낸 정양(가운데) 시인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병초 안도현 문태준 박성우 시인(왼쪽부터).
이날 기자간담회에 동석한 안도현 시인은 “서울의 이른바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어하는 건 문인들의 공통 욕망인데 이 때문에 문학권력에 대한 논란도 생겨난 것”이라면서 “지역에서 출판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한국문학판에 대한 자기 반성의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로지 상업적인 목적만을 위해 출판하는 행태에 대한 반성 혹은 자구책으로 사장된 좋은 원고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하겠다”면서 “정치건 문화건 모두 서울 중심인 현실에서 지역에서 시작하되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지역까지 퍼지는 다양한 문학 생태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간 목젖이 어지간히 간지러웠으나 할 말이 많았으므로 침묵을 고집했다’는 모악시인선 기획위원 문태준 시인은 “척박한 땅에 종자를 심는 일은 무모해보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일”이라면서 “특정 지역에서 출판한다기보다는 또 다른 중심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고 거들었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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