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74) 시인이 7번째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를 내고 서울에서 가진 기자간담회 뒷자리에서 우스개처럼 던진 말이다. 대체 어떤 시가 노경의 아내를 그리 눈물 나도록 웃게 만들었는지 물었더니 ‘그건 세 글자다’라고 했다. 그 시는 신문에서 중계하기에 다소 쑥스럽지만 비슷한 질감의 ‘We have to’ 한 대목은 이렇게 흘러간다.
“중간고사 끝난 다음 주 노총각 영어선생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용출이를 불러내더니/ 답안지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꾹꾹 찍으면서/ 시험이 장난이냐 이 쌍녀르 새끼야/ (...)/ 해브 투로 짧은글 짓는 문제에/ 우이 해브 투 핸드플레이라고 썼더니 저런다고/ 눈물을 훔치며 용출이는 더 크게 울었다”
정양 시인은 “어이없고 황당한 역주행의 시절이 어서 마감되기를, 그리고 의로운 호걸들이 양산박에 깃들었듯 우리 모악에도 강호제현의 따뜻한 마음들이 다투어 모여들기를 빈다”고 자서에 썼다. |
“눈 감으러 이발소에 오는 것 같다/ 목을 치기 전에 머리빡을 이렇게/ 몇 차례나 시원하게 박박 감겨주는/ 착하고 솜씨 좋은 망나니는 없었을까/ 오랏줄에 묶인 채 눈 감긴 채/ 원통한 목이 뎅겅 잘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 부릅뜨고 싶었을 머리통들이/ 여기저기 피범벅으로 뒹구는 게 보인다/ 박박 감아주는 손길에 머리통을 맡기고/ 눈 부릅뜨지 못한 일들을 눈 감은 채 헤아린다”(‘눈 감은 채’)
이 시집은 ‘모악’ 출판사의 첫 책으로 나왔다. 전북 지역 문인 김용택 이병천 안도현 유강희 등 20명이 1억원을 출자해 ‘문학의 다양성’과 ‘출판의 지속성’을 실현하기 위해 올 1월 설립한 출판사가 ‘모악’이다. 소설가 겸 시인이자 ‘살림’ 등에서 오래 편집자로 일했던 김완준을 대표로 초빙했다. 문인들이 출자해 그것도 지역에서 출판사를 꾸린 경우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정양 시집은 문태준 손택수 박성우 시인이 기획위원을 맡은 ‘모악시인선’ 시리즈 첫 책이다. 시집 외에도 문학 전반에 충실하면서도 청소년들을 위한 책과 문학 저변을 다지는 인문학 책도 꾸준히 펴낼 예정이다. 엄경희 구모룡 유성호 권혁웅 정끝별 등 5인의 시작법 시리즈가 준비돼 있고 내년에는 송찬호 시인의 어른을 위한 동화도 출간할 계획이다.
문인들이 출자해 전북 전주에서 출범한 출판사 ‘모악’에서 첫 시집을 펴낸 정양(가운데) 시인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병초 안도현 문태준 박성우 시인(왼쪽부터). |
‘그간 목젖이 어지간히 간지러웠으나 할 말이 많았으므로 침묵을 고집했다’는 모악시인선 기획위원 문태준 시인은 “척박한 땅에 종자를 심는 일은 무모해보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일”이라면서 “특정 지역에서 출판한다기보다는 또 다른 중심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고 거들었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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