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작가가 새로운 스타일과 참신한 표현으로 제시하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현실과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니, 때로는 현실보다 더 두렵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닙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에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김영하, 『읽다』 중에서
얼마 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프로기사 이세돌이 ‘알파고’라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바둑대결을 하여 세상이 떠들썩했다. 세계적인 기업 구글에서 기획한 행사인지라 전 세계에 중계되었고, 우리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바둑을 배운 적이 없어 바둑판을 보아도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읽지도 못하는 나까지 공연히 흥분해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설명을 들으며 일희일비했으니 무척 큰 사건이긴 했다. 그 대국은 인간과 AI(Artificial Intelligence) 즉, 인공지능과의 대결이라는 틀 안에서 흥미를 유발시켰다.
비록 다섯 판의 대국에서 이세돌이 한 판을 이기고 네 판을 내주며 경기가 끝났지만, 바둑의 역대 기보 3000만건이 입력되어 있고 무지막지한 계산능력을 장착한 AI와 인간의 싸움은 그 설정과 과정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결과를 떠나서 사람들은 이세돌에게 많은 격려를 보냈고, 미래에 대한 많은 생각과 의견 그리고 걱정이 오고 간 큰 사건이었다. 앞으로는 인간이 인공지능에 밀려날 것이라는 조금 유치한, 음모론이라기도 뭐하고 미래예측이라기는 더욱 뭐한 이야기가 떠돌았고, 급기야 인간을 대체할 분야의 목록이 여기저기에 올라왔다.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이상한 현상이 마치 어디선가 날아와서 우리의 머리 위에서 떠돌아다니는 황사처럼 우중충한 시야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해 충분히 예습을 하지 않았던가. 기계와 인간의 대결 혹은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은 영화나 소설이 아주 좋아하는 소재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기계와의 싸움을 마치 너무나 당연히 겪어야 할 미래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세돌을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로봇들과 싸우는 인간저항군의 대장 존 코너와 동일시하였고 영화 매트릭스에서 AI와 싸우는 네오와 겹쳐보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해보았다. 과연 기계에게 빼앗기지 않을 인간만의 독점적 지위는 무엇일까? 일반화되며 계량되는 학문이나 기술들은 아무래도 ‘저들’에게 가장 먼저 침탈을 당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지워가다 보니 마지막에 남은 것은 철학이나 문학 등 인간의 사고와 영감으로 피워 올려 개별적인 목소리로 완성하는 분야가 아닐까 생각하는 즈음에 또 기사가 하나 떴다.
일본의 대표적인 SF작가 호시 신이치(星新一)를 기리며 만든 문학상에 AI가 쓴 소설 네 편을 출품했는데, 그중 일부가 예심을 통과했다는 뉴스였다.
“그날은 구름이 드리운 우울한 날이었다. 방 안은 언제나처럼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洋子)씨는 씻지도 않은 채 카우치에 앉아 시시한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란다. 약간의 클리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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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가장 필수적인 설비를 넣은 절반 규모로 짓고 나머지는 살면서 확장할 수 있도록 구상한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반쪽짜리 집’. 입주 전(위쪽)과 주민들이 살면서 확장한 후의 모습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출처 : http://www.elementalchile.cl |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이며 당연히 허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다. 소설은 마치 어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만화경과 같다. 우리는 만화경 통에 눈을 바짝 붙이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간혹 만화경 안에서 펼쳐진 그림이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아주 가끔 있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허구이며 단지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든 이야기임을 다 알고 있다.
내가 왜 하고많은 소설가 중에서 유독 박완서의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박완서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도 읽었고 카프카도 읽었고 알베르 카뮈도 읽었지만, 그런 외국의 명작을 읽으며 피곤해지고 닳아버린 영혼이 쉬고 싶어질 때면 나는 어김없이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며 치유했다. 박완서의 소설은 웅장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가 막힌 이야기의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내가 사는 곳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복작복작 사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 이야기들이 좋았다. 그리고 그 글속에 들어가면 편안했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다지 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단히 영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우리 주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당시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며 좋다고 이야기하는 내 또래의 고등학생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휘청거리는 오후』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도 좋았지만 특히 내가 좋아했던 소설은 『엄마의 말뚝』이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작가 자신의 삶을 세밀화로 그려내듯 자세히 옮긴 이야기들이었다. 계속 읽다 보니 박완서가 어린 시절 살았던 박적골이나 서울로 올라와 살았던 현저동, 그리고 돈암동 한옥골목의 풍경이 나에게 아주 선명하게 새겨졌다. 마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 같았다. 간혹 내가 작가 대신 그녀의 전기를 써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나는 소설가 박완서를 직접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녀의 육성을 직접 들어본 적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소설이 허구가 아니라고 착각하고, 그녀의 생을 모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심지어 그녀의 일생을 같이 옆에서 살아봤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박완서의 소설에 귀 기울이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일상성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일상성이라는 것이 2차원적인 그림이 아니라 개개인의 피가 흐르고 살집이 잡히는 생생한 우리의 진짜 모습이고, 그런 일상성이 주는 안도감과 공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가가 또 있다.
일부러 문학상을 받는 소설을 챙겨서 읽지 않는데, 1991년에 서점에 갔다가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을 모아놓은 책을 한 권 산 적이 있다. 그해 이상문학상은 조성기라는 소설가가 받았다. 그는 『라하트 하헤렙』이라든가 『야훼의 밤』 등을 썼던 유명한 소설가였는데,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그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책의 가장 앞에 나오는 ‘우리 시대의 소설가’라는 작품에는 소설가인 강만우와 그를 괴롭히는 독자 민준규가 나온다. 독자는 소설가에게 내용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책값을 환불해달라고 조른다. 소설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체험담을 문학적인 수사를 동원한다든가 젠체한다든가 하는 것 없이 그냥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너무 심상해서 안 들어주고 그냥 지나치면 이야기하는 사람이 머쓱해질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 박완서의 소설과는 또 다른 일상성이며 리얼리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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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반쪽짜리 집’에 사람들이 살기 전 내부(위쪽)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모습. |
이후 나는 조성기의 소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은 박완서의 소설보다 더욱 소설과 현실의 경계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듯 뭉개놓아 찾기 힘들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는 나와,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내가 동시에 작동되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며 자란 도시, 고등학교 때 친구와 드나들었던 서울 시내의 사찰과 마당의 회화나무까지… 아주 시시콜콜한 신상을 다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일생을 마치 영화 트루먼쇼에서 트루먼 버뱅크의 일생을 관람하듯 소설을 통해 들여다보았고 관여하게 되었다. 물론 나의 감정이 그의 생에 침투되는 관념적인 관여였지만. 그리고 그의 소설이 새로 나올 때마다 읽으면서, 그 안에 들어있고 겹쳐지는 무수한 과거의 씨줄과 날줄을 같이 엮으며 검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해 기다리던 그의 소설집이 나왔다. 책을 손에 넣자마자 다 읽었는데, 그 안에 다시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일상이 펼쳐졌다. 그는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고 학생을 가르치고 종교적인 사색을 하고, 그 아래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겹쳐져 있는, 그가 지나온 하나하나의 시간과 공간들을 꺼내서 천천히 재료의 향을 살리며 이야기를 쌓아올린다.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타래에 감긴 실이 풀려나오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말을 궁금해하며 듣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아는 이야기이며, 대단한 결말이 있다든가 대단한 교훈이 남겨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냥 사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건 틀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밋밋하고 뻔한 이야기에 감흥을 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바그다드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부고가 전해졌다. 그녀는 말도 많고 탈도 있었지만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가 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설계했고, 그와 비슷한 화려하고 독보적인 디자인을 전 세계 도시에 뿌렸던 건축가이다. 학교에서 건축을 배우는 학생들이 미래를 꿈꿀 때 그렸을 만한 건축가의 이상형에 아주 가까웠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거대한 상업 자본이나 공공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건축이 꼭 자하 하디드의 건축처럼 거창하고 요란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의 2016년 수상자로 선정된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역대 수상자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해온 반면, 1979년 프리츠커 상 제정 이후 최연소 수상자(48세)인 그는 주로 칠레와 남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공공건축 프로젝트 그룹인 ‘엘레멘탈(Elemental)’을 이끌며 2010년 대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당한 칠레의 도시 재건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건축은 그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들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반쪽짜리 집(Half a house)’으로 불리는 저소득층을 위한 공동주택 작업이다.
그는 이키케의 퀸타 몬로에 30년 된 낡은 슬럼가의 100여가구를 재개발하면서, 5025㎡의 부지에 가구당 7500달러라는 저예산으로 건축면적 36㎡의 살 만한 집을 제공해야 했다. 그는 정부의 입장에서 주도했다 실패한 다른 사업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역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지 않고 거주지를 지키면서 앞으로 중산층 수준의 삶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집을 가장 필수적인 설비를 넣은 절반 규모로 짓고 나머지는 살면서 확장할 수 있는 집을 구상했다. 이미 살던 낡은 집을 고치고 늘리는 요령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던 주민들이 열심히 일한다면 나머지 반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응하듯, 2004년 입주 후 2년여 만에 집의 가치는 2만달러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한다. 사람이 공간에 몸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의 일상이 녹아들어 완성된 건축을 보는 것이 ‘반쪽짜리 집’에서 그렸던 건축가의 기대였을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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