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박태훈의 스포츠+] 17번의 주인공, 존 하블리첵…식스맨의 정의를 바꿔놓은 전설

입력 : 2016-03-12 09:19:00 수정 : 2016-03-11 14:43:26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박태훈의 스포츠+]

◇전설의 유니폼 넘버, 17번의 주인공…존 하블리첵, '식스맨' 정의를 바꿔 놓은 사상 최고의 식스맨

주전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 선수를 농구에선 '식스맨', 축구(11명 출전)에선 '슈퍼서브'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후보는 후보일 뿐이다.

이런 가운데 식스맨의 정의(선발보다 못한 후보)를 뒤바꿔 놓은 인물이 있다.

그의 등장 이후 식스맨은 주전에게 쉬는 시간을 벌어주는 노릇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에 등장해 힘과 센스로 경기흐름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전략적 무기로 등장했다.

식스맨의 투입시기에 따라 경기승패가 달렸으며 감독의 평가항목 중 '식스맨 활용'이 아주 중요하게 자리잡게 됐다 .

△보스턴 17번의 전설 존 하블리첵

존 하블리첵(1940년 4월 8일생·196cm, 93kg)은 미프로농구(NBA) 보스턴 셀틱스 황금왕조를 구가하게 만든 인물이다.

16시즌동안 보스턴에서 뛰면서 초반 7시즌을 식스맨으로 활동, 식스맨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레전드이다.

지난 2016년 2월 미국의 스포츠전문매체 ESPN과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역대 최고의 NBA선수 랭킹을 매겼다 .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이 당연하게 1위에 오른 가운데 ESPN은 하블리첵을 역대 28위, SI지는 22위에 올려 놓았다.

현역랭킹이 아니라 역대 랭킹에서 20위권에 들었다는 의미는 실로 어머어마하다.

선수생뢀의 상당부분을 식스맨으로 뛰고도 최고선수 대열에 든 것은 하블리첵이 유일하다.

하블리첵은 식스맨으로 뛰면서 팀을 무려 6차례나 NBA정상(개인통산 8번 우승)에 올려 놓았다. 

1977~78시즌이 끝난 뒤 보스턴 셀틱스는 그의 등번호 17번을 영구결번처리했다. 또 1984년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NBA는 출범 50주년을 맞아 'NBA를 빛낸 50대 스타'를 뽑을 때도 하블리첵을 잊지 않았다.

△만능 스포츠맨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하블리첵은 고등학교 재학시절 오하이오주 야구, 풋볼, 농구대표로 뽑힐 만큼 빼어난 운동재능을 과시했으며 특히 빠른발과 강인한 어깨를 갖췄기에 미식축구계가 탐을 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NCAA 정상(1960년)에 올려 놓았던 하블리첵은 1962년 NBA와 NFL 양쪽 모두 러브콜을 받았다.

NFL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를 그를 7라운드에 지명한 반면 NBA 보스턴 셀틱스는 1라운드 1순위, 전체 7위로 하블리첵을 잡아 당겼다.

△단지 팀에 보탬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1962~63시즌 보스턴 주전멤버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빌 러셀(NBA 11차례 우승)을 위시해 밥 쿠지, 빌 샤먼, 프랭크 램지 등 화려한 5인에 막혀 하블리첵은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입단 첫해 팀이 부르면 군말없이 코트로 달려나가 팀에 보탬이 됐다.

하블리첵은 실제로 하브리첵이 프로 첫 5년동안 평균 출장시간 30분을 넘긴 것은 단 한 시즌에 불과했다. '모두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하나가 된다'는 보스턴의 운영 철학을 몸소 실천한 하블리첵은 짧은 출장시간에도 불구하고 매 플레이오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보스턴의 정신적 지주 빌 러셀은 1968~69시즌을 마친 후 "이제 셀틱스는 너의 팀이다. 너가 리더이다"며 하블리첵에게 자신의 임무를 넘겨주고 은퇴했다.

이후 선발로 출전한 하블리첵은 팀 전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보스턴을 두번 더 NBA정상(1974, 1976)까지 끌어 올렸다.

△스몰 포워드, 슈팅가드, 스윙맨, 드라마

하블리첵은 뛰어난 달리기실력과 슈팅, 리바운드 능력, 경기를 보는 흐름을 두루 갖췄다.

따라서 슈팅가드, 스몰포워드, 때에 따라선 골민 리바운드에 동원되는 등 전천후 식스맨으로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췄다.

또 상대 엔드라인 좌우를 넘나들면서 상대 수비진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는 스윙맨 노릇을 하며 보스턴이 손쉽게 골밑을 공략하거나 슈팅찬스를 잡게 만들었다.

존 하블리첵 명성을 드 높인 것은 1965년 '한경기 100득점의 사나이' 윌트 체임벌린이 버틴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격돌한 동부 컨퍼런스 결승 7차전.

경기 종료 5초를 남기고 보스턴 셀틱스에 109-110으로 한점을 뒤진 필라델피아는 공격권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들 216cm의 거인 체임벌린에게 패스를 연결, 골밑 득점 또는 파울을 유도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체임벌린의 자유투가 신통찮다는 것. 이에 필라델피아 돌프 세이즈 감독은 보스턴 선수 모두 체임벌린에게 신경을 쓰는 것을 역이용, 역전슈팅찬스 혹은 자유투로 뒤집을 작정을 하고 마지막 작전타임을 통해 가드 할 그리어스에게 슛이 좋은 쳇 워커에게 패스를 주라고 지시했다.

필라델피아의 그리어스가 볼은 넘기는 순간, 어디선가 하블리첵이 달려와 가로채기한 뒤 자기편 샘 존스에게 연결했다.

바로 그 순간 경기는 끝났다.

하블리첵을 통해 우리는 팀을 위해 그 어떤 자리도 마다하지 않은 희생정신과 어떤 일을 맡겨도 훌륭히 수행해 낼 수 있는 준비, 그 두가지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정은채 '반가운 손 인사'
  • 정은채 '반가운 손 인사'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