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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_] 전설의 16번 김주성, 프로축구 영구결번 1호인 '위-아래' 원조

입력 : 2016-03-05 09:43:00 수정 : 2016-03-04 16: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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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

◇전설의 유니폼 넘버, 16번의 주인공…①김주성, '아시아의 삼손'으로 불린 '위-아래' 원조 축구스타

김주성(1966년 1월17일생·동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은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한국축구계를 대표한 스타플레이어이다.

△위-아래 원조=최저에서 최고스타로, 공격수에서 최후방 수비수로

김주성이 프로무대에 데뷔했을 때 긴머리를 휘날리며 빠른 스피드로 그라운드를 휘젓는 그를 당시 언론들은 '아시아의 삼손'이라며 치켜 세우기에 바빴다.

김주성은 한국축구계에 특이한 존재 중 한명이다.

잘뛰는 것 하나만을 믿고 축구를 시작, 지방대 재학생으로는 보기 드물게 국가대표로 발탁됐으며 스스로 불같이 일어나 월드컵 3회연속 출전, 최초로 유럽무대에서 곧장 월드컵 본선 훈련캠프 합류, 한국프로축구 사상 첫 영구결번(부산 16번), 첫 은퇴경기의 주인공이라는 영광까지 꿰찼다.

또 최전방 공격수에 이어 수비수로도 프로축구 베스트11에 뽑힌 기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소개만으로도 김주성은 전설의 유니폼 넘버 한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

△뛰는 것 하나 믿고 출발한 김주성의 축구

김주성은 역시 천부적 발재간을 가졌지만 무엇보다 김주성하면 '스피드'이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장산리가 고향인 김주성은 어릴적부터 뛰는 것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넉넉치 못한 가정환경과 속초로 서울로 이리저리 이사 다녔지만 축구의 꿈을 키워 나갔던 그는 잘 먹지 못해 키가 작았다.

이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성수중시절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큼 운동에 매달려 중앙고 1년때 173cm까지 자라 '꼬마'소리를 면했다.

고교상비군에 이름을 올렸지만 당시만해도 '쓸만한 선수' 중 한명이었고 중앙고 축구부가 해체직전까지 가는 등 이런 저런 사정으로 수도권 대학 진학이 여의치 않았다 .

이런 그에게 조선대가 '동급생 2명'을 함께 받아주겠다며 스카우트 손길을 내밀자 우정을 위해 주저없이 광주로 내려갔다.

이후 타고난 스피드에 근력까지 붙어 그라운드의 야생마처럼 이리 저리 휘젓고 다녔다.

김주성은 88올림픽대표팀을 맡은 박종환 감독에 의해 조선대 2학년때인 1984년말 비록 국가대표 2진격이지만 처음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1985년 1월 월드컵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골을 넣은 김주성은 1985년 6월 대통령배 대회에서 번개처럼 상대 왼쪽을 파고들어 가운데로 크로스(당시에는 센터링이라는 용어를 구사했다)를 올려 레프트 윙의 정석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이후 스카우트 파동까지 겪고 86월드컵 최연소 선발 등 은퇴할 때까지 최고로 군림했다.

△ 김주성의 기록들

0…AFC올해의 선수 3연패=1989 1990 1991

0…프로축구 신인왕=1987년

   프로축구 MVP 2회=1991 1997

   프로축구 255경기 출전, 35골 17도움

   K리그 우승 3회, 준우승 2회

   수비수로 K리그 베스트11 선정=1996

0…분데스리가 34경기 출전 4골

0…A매치 77경기 14골

   월드컵 3회출전=1986 1990 1994

   아시안컵 MVP=1988

0…한국축구 첫 은퇴경기=1999년 11월 25일 속초

   한국프로축구 영구결번 1호(부산 16번)=1999년

   2호는 2011년 수원삼성 윤성효(38번)=2011, 3호는 대전 최은성 21번

△ 최고 공격수에서 최고수비수까지

김주성은 축구 최고무대인 유럽으로 만 28세(실제 나이는 1964년생)때인 1992년 진출한다.

86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지만 '5년간 국내에서 뛰어야 한다'는 특례규정에 묶여 1992년에서야 독일 보쿰으로 가게 됐다.

좀 더 일찍 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여튼 김주성은 분데스리가에서 두시즌을 보낸 뒤 1994년 여름 끝무렵 국내로 복귀했지만 복귀 직후인 그해 9월 무릎파열로 6개월 가까이 쉬게 됐다.

회복기간 팀에서 경험과 빠른 발, 리더십을 제대로 활용하자며 스토퍼 자리를 제의했다.

이를 받아 들인 김주성은 최고의 공격수에서 최고의 수비수로 변신에 성공했다.

프로축구사상 공격수로 MVP, 수비수로 MVP 상을 받은 것은 김주성이 유일하다.

이는 축구에 대한 애정, 팀에 대한 헌신, 자신을 낮추는 능력, 경기 감각 등 많은 것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김주성은 1999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축구계는 그를 위해 사상 처음 은퇴경기를, 또 팀은 그의 등번호를 한국프로축구 사상 처음 영구결번시키는 것으로 위대한 선수 김주성을 기렸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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