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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새 가지 끝에 돋는 새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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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2-19 20:41:32 수정 : 2016-02-19 20: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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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침묵으로부터 봄의 함성은 터져나오는 것
고독한 침묵에서 살아나고 또 깨어나는 것들이 있어
이월이, 우수절이 좋다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멧부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정지용, ‘춘설(春雪)’). 풍경의 빛과 온도가 하루가 다르다. 눈 녹고 얼음이 금가고 비가 되는가 싶으니 바람 또한 새로 따른다. 옹송그리던 개구리 등속들이 꿈처럼 어안 벙벙히 깨어날 것이다. 강물이 풀리면 암수달은 때를 놓칠세라 강물 위로 입을 오물거리는 물고기들을 낚아채고 새 바람에 떠밀리듯 기러기들은 더 북쪽으로 날아가리라. 미나리 새순 돋고 풀과 나무에도 싹이 트리라.

나는 이월을 좋아한다. 입춘과 경칩에 양다리를 걸친 채 그렁이는 듯한 우수(雨水)도 있으려니와, 짧은 데다 한갓진 것이 계절감도 존재감도 약한 달이 이 이월이다. 새삼스레 뭔가를 끝맺고 시작을 결심해야 하는 달도 아니고 기운생동에 만화방창하는 달도 아니다. 장마를 대비하고 피서를 준비해야 하거나, 열매를 탐하고 조락에 심금을 철렁여야 하는 달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것도 아님의 여유와 뭔가를 도모하지 않아도 되는 유예와, 그로 인한 여백과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달이랄까.

정끝별 이화여대 교수· 시인
이런 이월은 침묵의 가장자리에 있는 달이다. 우수를 품고 있는 이 이월은 결여된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시간이고, 더 먼 것들을 응시하게 될 징조와 전조로 가득한 시간이다. 봄의 함성은 겨울의 침묵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위대한 시간 속에는 언제나 침묵이 깃들어 있고, 세상 모든 사랑은 침묵 속에서 가장 멀리까지 뻗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봄은 겨울의 끝 이월(二月)로부터만이 아니라 고독한 침묵의 이월(移越)로부터도 오는 것이다.

자연의 시간으로는 이월이 침묵의 절정이어야 마땅하건만 일상에서는 도무지 침묵에 깃들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혼자 조용히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거늘, 혼자 있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고 적나라한 자신과의 독대야말로 견실한 삶의 밑거름일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고독과 성찰에 빠져들기란 바늘귀를 통과하려는 낙타에 버금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석에 들러붙은 쇳가루처럼 TV수신기와 컴퓨터, 휴대폰의 액정화면에 코를 박고 있는 한 우리는 혼자여도 혼자가 되지 못하고 조용해도 조용히 있지 못한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분당과 탈당과 공천과 공언이 난무했다. 북한은 광명성을 또 쏘아올렸고 개성공단이 폐쇄됐다.

테러와 난민과 이상기후에도 아랑곳없이 카톡에서는 모로코 캄보디아 제주 동해 등지에서 먹고 타고 오르고 달리는 사진들이 까득, 까득, 올라왔다. 게다가 나는 이사를 해야 했고 직장에서는 온갖 사업 참여와 변화 쇄신의 독려로 분주했다.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마감, 마감, 마감에 걸렸고 집안 어른이 쓰러지셨고 가족들의 악재가 겹쳤다. 경기는 마이너스 성장이라는데 물가는 뛰었고, 전세값은 기록을 경신했고, 이자도 학원비도 늘어만 갔다. 근심과 불안과 우울로 무기력해지곤 했고, 그때마다 채널을 돌려가며 쇼호스트들이 내뱉는 소란한 말들의 성찬에 넋을 놓고 있기 일쑤였다.

우수절 들어 먼 산이 이마에 찼다! 이월하는 이월이랬거니, 우수도 하루쯤 지났거니, 얼음 풀리는 강물을 그려본다. “어두운 한겨울의 눈이 그치고/ 봄날에 이월달의 물이 솟을 제/ 너와 나 사이의 언짢음도 즐거움도/ 이제 새로 반짝이리 봄 강물처럼. ”(황동규, ‘봄날에’). 며칠 남지 않은 이월(二月)이라도 잃어버린 이월(移越)의 침묵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침묵에서 살아나고 또 깨어나는 것들이 있어서 이월이 좋고 우수절이 좋다. 바람 다르니 마음도 다르다. 잃어버린 이월의 침묵을 회복할 수 있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봄을 향해 달려가는 물소리를 떠올리는 두 귀 끝이 한 눈금쯤 올라가 있다. 새 가지 끝에 돋는 새순처럼!

정끝별 이화여대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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