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찢겨진 생의 상처 누빔질하는 여인들

입력 : 2016-01-07 20:14:21 수정 : 2016-01-07 22:52:0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김숨 장편 ‘바느질하는 여자’ 누비옷이란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을 넣고 바느질한 옷을 말한다. 옛 사람들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고안한 전통적인 방한복이다. 길게 이어진 실 하나를 사용해 선 한 개를 완성하며 수백개의 선에 좁쌀만 한 간격으로 수만개의 바늘땀을 만들어 옷 한 벌을 지어내는 일은 고행에 가깝다. 김숨(42) 장편소설 ‘바느질하는 여자’(문학과지성사)는 누비 바느질하는 여자를 내세워 고통스러운 생을 바느질하는 법을 보여준다. 쓸쓸하지만 의연하고, 멀쩡한 듯하지만 바늘에 찔린 자욱한 내면의 상처들을 시적인 문장들에 실어낸다.

근년 들어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며 주목할 만한 작가로 자리를 굳힌 소설가 김숨. 그는 ‘산비둘기의 찢긴 날개 같은 천조각’들을 모아 그 위에 누비 바느질로 장편소설 ‘바느질하는 여자’를 지어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남수덕, 서금택, 박화순. 이 세 여자의 성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바느질 유전자가 흐르는 모녀요, 자매다. 어머니 수덕은 ‘우물집’ ‘서쪽방’에 들어 하루 종일 수도하듯 누비 바느질을 하는 여자다. 금택과 화순이 진짜 자매인지 아닌지 친절하게 밝히지 않으면서 630쪽에 이르는 두꺼운 장편 내내 바느질하는 여자들의 사연을 바늘땀을 뜨듯 엮어낸다. 사연을 바느질하는 김숨의 문장들이야말로 이 소설을 읽는 매력이다. 흙먼지나 바람조차 김숨이 바느질하면 옷감으로 빚어진다.

“신작로에 무명흙먼지만 이는 것은 아니었다. 투박하고 거친 광목흙먼지도, 빳빳하고 깔깔한 생명주흙먼지도, 짜임이 성기고 부드러운 갑사흙먼지도 일었다. 광목흙먼지가 이는 날이면 미루나무는 무명흙먼지 적삼을 벗고, 광목흙먼지 두루마기로 슬그머니 갈아입었다. 비 온 뒤면 돌멩이들은 풀기 덜 마른 무명흙먼지로 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음식이나 숨결조차 옷감이다. ‘은빛갈치 살점이 덩어리로 떠 있는 미역국은 양단’이고 월성댁의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에서 새어나는 입김은 ‘명주실’이다. 연노랑 송홧가루는 옥사(玉絲)요, 서쪽 방 아궁이 위 가마솥이 토해내는 연기는 ‘너덜너덜 찢긴 무명’일 때도 있다. 잔잔하고 아늑한 문체로 풀어내는 여인들의 바느질 수도행은 촘촘하고 따스하다.

금택을 젖먹이시절부터 키웠던 함경도 부령이 고향인 부령할매는 죽은 이들에게 입혀 보내는 옷만 짓는 할매였다. 그 할매에게 어머니 수덕은 누비 바느질을 배웠다. 할매는 죽은이들 것만, 어머니는 산 자들의 옷만 지었지만 그들이 궁극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아우르는 ‘업을 짓지 않는’ 어미들이었다. 정인한복, 아씨한복, 복래한복, 영천한복들이 늘어선 한복 거리의 여자들은 조용히 사라지거나 죽어서야 바늘을 놓았다. 이들의 다양한 사연도 김숨의 여러 땀 바느질에 엮여 읽는 이들의 가슴을 무두질한다.

금택과 화순은 어머니의 딸이라는 자리를 두고 내밀하게 서로 견제하고 갈등한다. 어머니를 두려워하면서 닮으려는 금택, 끊임없이 떠나려고 하지만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화순. 그들은 과연 같은 어머니를 둔 자매였을까. 누비 바느질하듯 인내하며 김숨의 문장 바느질을 따라가다 말미에 이르면 그 사연이 드러나거니와 생과 사를 잇는 그 훈향이야말로 끝까지 따라간 독자들만의 보람일 터이다.

이 소설에서 남자들은 한결같이 씨만 뿌려놓고 죽거나 떠나는 존재들이다. 여자들은 뒤에 남아 짧고 얇은 누비 바늘로 내내 생을 바느질하며 상처를 달랜다. 금택과 화순의 어머니가 줄곧 머무르는 ‘서쪽 방’은 고행으로 무두질하는 우리네 삶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딸들은 그 서쪽 방을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생은 누비 바느질을 닮았다. 한 땀만 더 뜨면 될 것 같은, 그리하여 수천 수만의 바늘땀을 만들어나가다 ‘녹원삼’ 너머 죽음으로 건너가는 그런 바느질이다. 어머니는 더 이상 바늘을 들 수도 없고 기억마저 외출한 치매 늙은이가 되었다. 그네가 미싱과 양장점과 기성복에 밀려 사라진 지 오래인 한복거리 여자들의 환영을 불러내 집단으로 죽은 이를 위한 ‘수의’를 만드는 장면은 잔잔한 장관이다. 그네들의 바느질은 한 땀 한 땀이 쌀 한 톨이었고, 생을 견디는 주술이었다. 바람과 햇살로 바느질하는 김숨의 이런 문장은 어떤가.

“바느질하는 손은 허공에서 명주햇살실을 한 가닥 뽑아들었다. 초를 먹인 듯 빳빳한 명주햇살실은 번번이 바람바늘의 귀를 벗어났다. 허방을 짚던 명주햇살실이 마침내 바람바늘의 귀에 꿰어졌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
  • 수지 '하트 여신'
  • 탕웨이 '순백의 여신'
  • 트리플에스 코토네 '예쁨 폭발'